인공지능(AI)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과 맞물려 차세대 반도체 경쟁이 반도체 패키징 기술의 혁신으로 꼽히는 ‘유리 기판’으로도 옮겨붙고 있다.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고성능 칩일수록 작동할 때 막대한 열이 발생하는데 유리 기판이 이러한 열 폭주를 견뎌내는 미래의 기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차세대 반도체 시장을 뒤흔들 게임체인저로 꼽히는 유리 기판은 아직 상용화 단계에 진입하진 않았지만 이르면 1~2년 안에 시장이 본격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SKC·삼성전기·LG이노텍 등 국내 전자 부품 3사는 일찌감치 반도체 유리 기판을 미래 먹거리로 지목하고 자본과 기술력을 투입해 시정 선점을 위한 경쟁에 뛰어든 상태다.
반도체 칩이 작동하려면 개별 칩을 기판 위에 올려 외부 시스템과 연결하는 ‘패키징 공정’을 거쳐야 한다. 반도체 기판은 패키징 공정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분야다.
현재 주로 사용되는 기판은 플라스틱 계열의 유기 기판이다. 플라스틱 소재 특성상 표면이 거칠고 고온 공정 과정에서 휘어짐이 발생해 갈수록 미세하고 정교해지는 고성능 반도체 패키징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리콘을 중간 기판(인터포저)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도입됐지만 인터포저가 추가되면서 두께가 두꺼워지고 전력 손실이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에 비해 유리는 공정 미세화, 성능 고도화 추세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소재로 꼽힌다. 우선 열에 강해 휘어짐 현상이 적어 발열이 심한 고성능 칩을 안정적으로 받쳐준다.
표면이 매끄러워 미세한 회로를 더 정밀하게 새길 수도 있다. 적층세라믹콘덴서(MLCC·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공급하는 핵심 부품)를 기판 내부에 내장할 수 있어 여유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에 더 큰 용량의 칩을 배치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만큼 데이터 전송 속도는 빨라지고 전력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업계에선 유리 기판을 도입하면 데이터 처리 속도는 40% 이상 빨라지고 전력 소비는 30% 이상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만들기가 까다롭다는 점이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게 유리의 강점이라면 유연하지 않고 충격에 깨지기 쉬워 공정 과정에서 파손되거나 미세한 스크래치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섬세한 가공 기술이 필수적이다. 이와 함께 장비 도입, 자동화 시스템 구축 등 투자 비용도 높다.
이렇듯 제조 난도가 높고 비용도 많이 드는데 기업들이 시장 선점에 뛰어든 이유는 유리 기판이 단순히 소재 변화를 넘어 반도체 패키징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유리 기판 시장을 선점하는 기업이 향후 수십년 간 글로벌 패키징 시장의 표준과 주도권을 가져갈 것이라고 본다.
이와 함께 유리 기판은 수십만 대의 고성능 서버가 구축되는 대규모 데이터 센터, AI 기술이 탑재되는 자율주행차, 방대한 데이터 처리를 필요로 하는 6G 무선 통신 분야에도 적합해 활용 범위도 무궁무진하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TBRC에 따르면 글로벌 유리기판 시장은 매년 평균 6.6%씩 성장해 2029년에는 108억5000만 달러(약 15조9000억원)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국내 3사 중에선 SKC가 가장 적극적인 상황이다. SKC는 2021년 반도체용 유리 기판 자회사 앱솔릭스를 설립하고 미국 조지아주 커빙턴에 유리 기판 생산 공장을 완공했다. 내년 초부터 본격 양산하는 것을 목표로 현재 글로벌 반도체 기업 AMD, 아마존 등 고객사와 품질 인증을 위한 테스트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조지아 공장을 직접 방문해 개발 현황을 점검할 만큼 그룹 차원에서도 공을 들이고 있다.
삼성전기는 세종사업장에 유리 기판 시범생산(파일럿) 라인 구축을 완료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일본 스미토모화학그룹과 유리 기판의 핵심 소재인 글라스 코어 제조를 위한 합작법인(JV)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핵심 공정 기술을 내재화하려는 전략이다. 삼성전기는 2027~2028년 상용화를 목표로 삼성전자와 협력해 AI 및 서버용 반도체 패키지에 유리 기판을 적용할 계획이다. 장덕현 사장은 2023년 12월 한 행사에서 “AI 반도체의 성능 향상은 기판 혁신에 달려 있다. 글라스 코어 기술로 차세대 패키징 시장의 판도를 바꾸겠다”고 밝힌 바 있다.
LG이노텍은 경북 구미 사업장 내에 유리 기판 시범생산 라인을 구축하며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후발주자로서 2027~2028년 양산을 목표로 기술 경쟁력 확보에 주력 중이다. LG그룹 차원에서 전장(자동차 전기 전자 장비) 분야에 유리 기판을 접목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지금까지 유리 기판 기술을 선도해온 미국의 인텔은 2030년쯤 유리 기판을 적용하는 목표는 유지하되, 자체 생산보다는 외부 조달로 전략을 선회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제조 전문성이 있는 한국 기업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열린 셈이다. AMD와 세계 최대 파운드리 TSMC 모두 각각 2028년 양산을 목표로 유리 기판 기반의 패키징 기술 개발에 나서면서 경쟁은 한껏 달아오르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10일 “국내 기업들이 유리 기판 기술을 선도적으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한국이 AI 반도체 시대의 핵심 공급망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잡는 결정적인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