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총생산(GDP)의 90%가 넘는 가계 신용(빚)을 10% 포인트 줄이는 대신 기업 신용을 10% 포인트 늘리면 장기 경제 성장률이 매년 0.2% 포인트 오른다는 한국은행 연구 결과가 나왔다. 부동산 등 비생산 부문에 묶인 자금을 기업 등 생산 부문으로 돌리기만 해도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은이 9일 내놓은 ‘생산 부문 자금 흐름 전환과 성장 활력’ 보고서를 보면 2024년 말 기준 GDP 대비 90.1%인 가계 신용 규모를 80.1%로 낮추고 110.5%인 기업 신용을 120.5%로 높이면 장기 성장률이 연평균 0.2% 포인트 상승한다. 가계 신용이란 일반 가계가 은행 등에서 빌린 가계대출과 신용 카드 사용액 등 판매 신용을 더한 것으로 가계의 모든 부채를 의미한다. 황인도 한은 경제연구원 금융통화연구실장은 “부채 총량은 그대로 두고 비생산 부문인 가계 신용을 생산 부문인 기업으로 재배분하는 것만으로도 성장 잠재력을 높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분석 결과 외부 자금 의존도가 높은 산업과 중소기업 중심 산업, 자본 생산성이 높은 산업에서 신용 재배분에 따른 GDP 성장률 제고 효과가 컸다. 대출금이 1% 포인트 상승할 때 외부 자금 의존도가 높은 산업의 매출액은 0.26% 포인트, 중소기업 중심 산업은 0.19% 포인트, 고생산성 산업은 0.17% 포인트 올랐다. 한은은 사업 경력이 짧은 신생 기업일수록 외부 자금 의존도와 생산성이 높으므로 신용 재배분 효과가 크다고 강조했다. 다만 가계 신용에서 끌어온 자금을 부동산이나 건설업에 배분할 경우 경제 성장률이 상승하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중 자금 흐름을 가계에서 기업으로 바꾸려면 금융사의 유인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한은의 분석이다. 은행권의 위험 가중치 등 자본 규제를 바꿔 주택담보대출을 덜 내주고, 중소기업대출은 더 내주도록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신생 기업의 자금 조달을 방해하는 담보 중심의 대출 심사 관행도 사업성·기술력 기반으로 바꿔야 한다. 자본 시장과 벤처캐피털(VC)을 더 키워 기업 인수·합병(M&A)이나 상장(IPO)을 원활히 하는 노력 역시 병행돼야 한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해당 보고서가 발표된 한은·한국금융학회 공동 정책 심포지엄 환영사에서 “한국의 잠재 성장률은 현 추세라면 2040년대 0%대까지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면서 “여기엔 자원이 생산성이 높은 부문으로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한 영향도 컸다”라고 말했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