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결국 세상만사는 모두 순환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철도원 삼대’ 이후 5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할매’로 돌아온 소설가 황석영은 9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작품의 핵심을 이렇게 설명했다.
‘할매’는 전북 군산 하제마을의 600년 된 거대한 팽나무를 중심으로 조선 건국 초기부터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장편이다. 시베리아의 차가운 눈보라를 뚫고 날아온 철새 개똥지빠귀가 금강 하구의 빈터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소설은 시작한다. 새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뱃속에 품고 있던 팽나무 씨앗은 긴 겨울을 견딘 후 싹을 틔워 마을의 수호신 ‘할매’가 된다. 소설 중반까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작가로서 사람이 빠진 서사를 쓰는 건 처음이라 어색했지만 마치 헤밍웨이가 만년에 ‘노인과 바다’를 쓰며 느꼈을 자연과 교감하는 기쁨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팽나무가 한 겹씩 나이테를 늘려갈 때마다 그 그늘을 스쳐 간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대기근의 비극과 천주교 순교의 역사, 우금치에서 스러진 동학농민군, 새만금 갯벌과 미군기지 반대 운동까지 이어진다. 그는 “자연 세계, 사람이 아닌 세계에 대한 얘기를 쓰면서 대단히 깊은 감흥을 느꼈다”며 “앞으로도 여기서 더 확장된 소설을 쓰게 될 것 같다. 600년 된 나무가 현재의 우리에게 삶과 죽음, 우리가 이룩한 사회와 문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올해로 82세인 황석영은 여든을 넘기며 기력이 급격히 쇠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늙은 작가의 소망은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로 한 발 더 나아가 정말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라며 “‘할매’를 굉장히 힘들게 썼지만 덕분에 다음 작품은 더 잘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든다. 앞으로 두세 편은 더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벨 문학상 수상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 “노벨상이 가진 서구 중심주의,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강대국의 패권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문화 예술을 일으켜 세워보려는 작가들과 연대해 새 흐름을 만들어보려 한다”며 1980년대 명맥이 끊긴 ‘로터스(Lotus)상’의 부활 계획도 밝혔다. 아시아·아프리카 등의 자유와 저항, 인권 신장에 기여한 작가에게 주는 상으로, 제3세계 노벨문학상으로 불린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