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률 고작 26.4% 불과한데
기금화 등 공적 통제 추진은
모래 위에 고층 빌딩 올리는 격
당초 근로자 임금 보호 위해
도입된 제도가 정부 정책에
동원될 경우 재산권 침해 소지
낮은 수익률 개선 위한다면
가입자 역량 및 규제 완화 등
다른 방법들도 충분히 가능해
기금화 등 공적 통제 추진은
모래 위에 고층 빌딩 올리는 격
당초 근로자 임금 보호 위해
도입된 제도가 정부 정책에
동원될 경우 재산권 침해 소지
낮은 수익률 개선 위한다면
가입자 역량 및 규제 완화 등
다른 방법들도 충분히 가능해
한 후배가 최근 하소연을 했다. 퇴직연금을 확정급여(DB)형에서 확정기여(DC)형으로 전환한 뒤 스스로 공부해 조선·반도체·양자컴퓨팅 등 다양한 분야에 투자하며 나름의 수익을 쌓아왔는데, 정부가 갑자기 “대신 굴려주겠다”며 기금화 논의를 본격화하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생 일해 모은 노후자금을 스스로 설계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제도 개편이라는 이름 아래 흔들리고 있다는 불안이었다.
실제 국회에 발의된 여러 법안을 살펴보면 형태는 다르지만 흐름은 같다. 퇴직연금을 국민연금처럼 대규모 기금으로 통합하려는 안, 국민연금공단이 직접 운용하자는 안, 중소기업 근로자의 퇴직연금을 공적 제도로 편입시키는 안 등이 잇따라 등장했다. 정부는 정년퇴직자의 일시금 인출을 금지하고 연금 형태로만 지급하는 방안까지 추진하려 한다. 방향은 분명하다. 퇴직연금을 사적 재산에서 공적 통제 체계로 넘겨 국가가 장기 운용·관리하겠다는 구상으로밖에 달리 이해가 안 된다.
퇴직연금 도입률은 전체 사업장의 26.4%에 불과하다. 이 상태에서 기금화를 서두르면 제도 사각지대는 그대로 둔 채 ‘있는 사람의 돈만 더 관리하고, 없는 사람은 방치되는’ 이중 구조가 심화할 수밖에 없다. 대기업은 대부분 퇴직연금을 갖추고 있어 기금화 적용이 가능하지만, 인력·비용·관리 여력이 부족한 중소·영세사업장은 제도 밖에 그대로 남게 된다. 적용 안 되는 사람이 훨씬 많으므로, “강제화냐, 의무 가입이냐, 국민연금 2탄 아니냐”라는 정치적 갈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가입률을 제쳐두고 기금화만 밀어붙이는 것은 모래 위에 고층 건물 올리는 격이다. 기금화 논쟁으로 정책적 자원이 빨려 들어가면 가장 중요한 가입률 개선은 후순위로 밀리고 430조원 규모의 연금 운용권을 둘러싼 싸움이 격화되면서 제도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 본질적인 건 퇴직연금이 애초 ‘수익률 제고’를 위해 도입된 제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기업들이 퇴직금을 제때 적립하지 않거나 유용하다가 부도라도 나면 근로자가 퇴직금을 떼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20년 전 근로자의 사적 재산을 기업주의 무책임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도입한 것이 퇴직연금이다. 그런데 퇴직연금을 공적 기금으로 전환하고 운용권까지 통제하려는 움직임은, 제도의 원래 취지를 정반대로 되돌리는 행태다. 결국, 국민의 노후자산을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정책용 쌈짓돈’으로 만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고환율 국면에서 정부가 국민연금을 외환시장 안정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논란이 그치지 않는 것도 이런 우려와 무관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연금까지 공적 통제체계로 편입되면, 정부의 급한 재정·정책 수요가 생길 때 두 연금 자산이 동시에 동원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런 점에서 과거 퇴직금을 유용하던 악덕 사업주와의 본질적 차이도 흐려진다.
시장도 불안해하고 있다. 431조원 규모의 퇴직연금이 기금화되면 AI 펀드 등 정부의 정책 사업에 유용되거나 대규모 자금이 증시로 흘러들어 코스닥·벤처 시장이 인위적으로 들썩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3차 벤처 붐’을 기대하기도 하지만, 국민 노후자산으로 증시를 띄웠다가 닥칠 후폭풍을 더 염려한다.
정년퇴직자의 일시금 인출 제한 방안은 우려를 더욱 키운다. 퇴직연금을 국민연금처럼 매달 용돈 주듯 지급하겠다는 구상은, 국민을 한 우리에 가둬놓고 소비쿠폰을 나눠주듯 일정한 용돈만 허용하고 국가가 ‘요리조리 써보겠다’는 발상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은퇴자는 주거 이전, 의료비, 부채 상환 등 다양한 필요가 있는데, 이를 국가가 정한 방식으로만 쓰도록 제한한다면 이는 헌법이 보장한 재산권과 자기 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다분하다.
물론 퇴직연금 제도의 저수익·고수수료 문제, 금융기관 중심 운용, 가입자 금융 이해도 부족 등은 개선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경쟁체계 강화, 수수료 개혁, 디폴트 옵션 고도화, 가입자 역량 강화 같은 시장 기반 접근에서 해법을 찾아야지 국가가 운용권을 독점하는 기금화 모델은 그 자체로 해답이 될 수 없다. 근로자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한 제도가, 정부의 과도한 통제로 국민 재산권을 그것도 노후 자산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퇴행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