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엑셀 vs 한글

입력 2025-12-10 00:31

평생 한글만 사용한 본부장
엑셀로만 회사 경영한 대표
서로 배우며 균형 맞춰간다

입사하고 이틀이나 지났을까. 대표에게 보고할 내용이 있어, 한글(hwp) 파일을 전달했다. 대표가 급히 날 찾았다.

“본부장님, 제가 컴퓨터에 한글이 없어서 그러는데, 엑셀(Excel)로 간략하게 정리해서 다시 주시겠어요?”

“컴퓨터에 한글이 없으시다고요? 제가 엑셀을 할 줄 모르는데….”

우리는 서로를 5초 정도 멍하게 쳐다봤다. 대표도 나도 사회생활을 10년 넘게 했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잔뼈가 제법 굵다. 그러니 서로에게 기대하는 ‘기본값’이 있었던 거다. 나는 ‘한글 없으면 문서 작업은 뭐로 한단 말인가!’ 싶었고, 대표는 ‘사회생활 10년 넘게 했다면서 엑셀도 안 배우고 뭐 했단 말인가?’ 싶었을 거다.

나 먼저 변명하자면 국문과 졸업하고 곧장 기자로 일했다. 목수로 산 세월도 있지만, 그때도 컴퓨터 앞에서만큼은 작가였다. 그러니까 밥 벌어먹기 시작한 후로 한글 외에 오피스 도구는 쓸 이유가 없었다.

난 언제나 새하얀 한글 켜놓고 하나의 주제를 파고들었다. 단어와 단어를 조합해 문장 완성하고, 그 문장을 물어 다음 문장 더듬고, 그다음 문장을 자빠트려 문단에 가뒀다. 그 문단과 다음 문단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종으로 끝까지 파고 난 뒤에야 새로운 한글 파일을 열 수 있었다.

반면 대표는 경영학과 졸업하고 줄곧 대기업에서 마케팅하다가 사업을 시작했다. 대표 말에 따르면 대기업에 입사해 월별 예산과 전환율, 핵심성과지표(KPI)와 손익분기점, 연도별 매출 따위의 도식화된 표와 그래프, 숫자를 계산하다 보니 10년이 훌쩍 지났다고 했다. 그런 경력 덕분인지 대표의 엑셀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회계 담당 직원보다 수식을 잘 다루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입사 전 회사에 처음 방문했을 때다. 대표는 날 스카우트하려고 했고, 나 또한 사업 내용이 흥미로웠다. 얘기나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다. 그날 대표는 기형적으로 와이드한 모니터(참고로 난 세로형 모니터 쓴다)에, 횡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숫자를 가리키며 회사 비전을 설명했다.

내가 언제나 궁금해하는 건 상황과 맥락, 그 이면의 사연과 표정이었다. 그런 나에게 대표는 수많은 통계자료의 들쭉날쭉한 그래프를 보여주며 “여기에서 이 비율만 이렇게 잡으면 1년 뒤엔 이 정도 매출이 가능하다”고 차분히 설명했다. 화면 가득 메운 숫자와 수식을 보며, 난 ‘저 숫자 뒤에 가려진 얼굴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입사한 다음부터 대표와 날 수시로 비교 관찰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게 있다. 도구는 손끝만 바꾸는 게 아니었다. 사고까지도 규정한다. 얘기했듯, 난 한글로 사고하고 대표는 엑셀로 사고한다.

대표가 A열에서 0과 1 가운데 하나를 빠르게 선택하고 B열, 다시 C, D열로 넘어가는 사람이라면 난 A열에서 0과 1 사이를 고민하며 2행, 다시 3, 4행으로 내려가는 사람이다. 대표는 끝없는 추진력으로 확장하고, 난 집요한 관찰력으로 파고든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난 내일과 모레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고, 대표는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는 꼼꼼함이 부족하다.

입사한 지 6개월쯤 지났다. 대표는 마침내 한글을 깔았고, 난 엑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듯, 자그마한 스타트업에서 우린 조금씩 균형을 맞춰간다. 대표는 오늘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차분히 뒤를 쫓으며 빈틈을 메운다. 틀린 건 없다. 한글이 있어야 회사에 온기가 돌겠지만, 그럼에도 역시 엑셀이 있어야 회사가 굴러갈 수 있다.

그렇다는 걸 이제는 나도 안다. 대표가 급히 또 날 찾는다. 내 한글 보고서를 가리키며 “본부장님,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예스예요, 노예요?”라고 묻는다.

“대표님, 여기에서 중요한 건 ‘예스’냐, ‘노’냐가 아니라….” 틀린 건 없다.

송주홍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