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밤밥을 지으며

입력 2025-12-10 00:35

냉동실에 보관한 밤 봉지를 꺼냈다. 설익게 데쳐뒀던 뽀얀 밤들은 그릇 속으로 ‘톡, 톡’ 하고 굴러떨어지며, 지나간 가을을 다시 불러내는 소리를 냈다. 오늘은 밤밥을 짓는 저녁. 마음속에서는 가을 산의 들머리를 다시 밟고 있었다.

가을의 산길은 그 자체로 거대한 소쿠리 같았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 뾰족한 가시로 으름장을 놓는 외형과 달리, 벌어진 밤송이 사이에 귀여운 자태로 들어앉아 있는 밤알이 보였다. 산이 건네는 깜짝 선물이었다. 햇살을 머금어 매끈하게 빛나는 밤알을 냉큼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아닌 척하면서 다정하기는. 잘 먹을게!” 엄지손톱만 한 작은 밤알은 다람쥐의 겨울 양식으로 남겨두고, 발에 치이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하나둘 주워 담다 보니 주머니로는 부족했다. 재미난 놀이처럼 시작한 일이었는데, 등산 가방이 묵직해질수록 마음이 벅차올랐다.

두 손으로 자연의 결실을 매만지는 추수는, 소소한 수확의 보람보다 땅이 건네주는 것을 거저 얻어가는 감사와 기쁨이 더 컸다. 먼저 온 등산객의 손에도 기쁨이 닿았는지, 활짝 벌어진 빈 밤송이에도 반가움이 어렸다. 내일은 한 소쿠리쯤 담아보겠노라 괜한 욕심을 내면서도, 정작 욕심을 채우는 것보다 행복한 건 ‘정성껏 만들었어요. 마음껏 가져다 드세요’ 하는 자연의 넉넉함을 느끼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밤을 넣어 밥을 짓는다. 물에 잠기는 밤알 하나하나에 보물찾기 같던 추수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칙칙 증기를 뿜는 압력밥솥에선 가을의 정취 아래 밤을 줍던 날의 즐거움과 자연의 풍성함을 작은 동물과 나누었던 내 하루하루의 행운까지 함께 익어간다. 나는 밤밥이 익어가는 냄새 속에서 다시 한번 감사해진다. 동화처럼 예쁜 계절을 지냈다는 사실에, 가을의 결실을 오늘의 삶으로 데려왔다는 사실에. 숟가락을 들면 풍요로웠던 그 감사의 기쁨이 밤알의 단맛처럼 입안에서 퍼져나갈 것 같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