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한 가을바람이 불던 토요일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서울 잠원동에서 신길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라디오에서 난데없이 이런 뉴스가 흘러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향년 62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이끌고 나온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온 국민과 더불어 애도하는 바입니다.”
당시 내 아버지는 중앙정보부(중정) 의전과장이었다. 대통령의 서거 뉴스를 듣고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아버지 걱정부터 했다. ‘우리 아버지 엄청 바쁘시겠다. 당분간 일찍 퇴근하시긴 힘들겠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 사건에 연루됐음을 알게 된 것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김재규의 최측근이던 아버지는 10·26에 가담한 ‘역적’으로 몰린 상태였다. 그러니 집안 꼴이 어떻게 됐겠는가. 나는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충격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우리 가족의 일상은 크레바스처럼 갈라졌고 온갖 절망과 슬픔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쳤다.
10·26이 있었던 1979년부터 지금까지 이 사건이 남긴 질문들은 내 삶을 옥죄었다. 왜 아버지는 대통령을 살해한 어마어마한 일에 가담했을까,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신 걸까….
꼬리를 무는 질문들 사이를 서성이면서 46년을 보냈다. 긴 세월 동안 곱씹고 되씹은 질문들을 통해 내가 내놓게 된 답은 ‘순명’이다. 순명은 누군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順命)는 의미로도,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殉名)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 옛날, 아버지가 벌인 일은 하늘처럼 모시던 직속상관을 위해 아버지가 실천한 순명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목회자인 내가 지고의 가치로 삼은 것도 순명이 됐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주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것, 크리스천이 지녀야 할 태도로는 그 이상의 것이 없을 테니까.
아울러 46년 전 그날 이후 내게 펼쳐진 삶을 복기하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내가 겪은 모든 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마주한 방황의 시간은 나의 신앙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광림교회라는 신앙의 보금자리를 찾아가게 해줬다. 이 교회 창립자인 고(故) 김선도 감독님을 모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되짚어볼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말씀이 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하나님이 모든 것을 관장한다는 이 말씀에서 나는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위로를 받곤 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1962년 서울 출생 △아주대 전산학과(현 소프트웨어학과) △감리교신학대 신학석사, 미국 웨슬리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MDiv)·목회학 박사(DMin) △광림교회 기획목사 역임 △경기북부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월드비전 이사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상임대표 △일산광림교회 담임목사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