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 상황마다 기도, 촬영 과정이 응답이었죠”

입력 2025-12-09 03:02
이창열 감독이 최근 서울 강남구 사무실의 영화 피렌체 포스터 옆에서 신앙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올해 미국의 ‘글로벌 스테이지 할리우드 영화제’가 주목한 건 자극적인 스릴러나 화려한 액션이 아니었다. 한국 영화 ‘피렌체’가 이 영화제에서 작품상·감독상·각본상의 3관왕에 올랐다.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중년 남성의 여정을 그린 한국 영화가 세계적 주목을 받은 것이다.

최근 서울 강남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이창열 감독은 “모든 제작 과정이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고등학교 때 처음 교회에 나갔다는 이 감독은 현재 세종시의 한 교회 집사다.

“위기마다 기도, 모든 게 응답”

“하나님 보고 계시죠. 좀 도와주세요.” 이 감독은 촬영 중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잠시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그는 “촬영 현장은 변수와 제약의 연속으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며 “어려운 장면이나 돌발 상황 앞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붙잡았다”고 말했다.

기도는 응답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국민 배우 세라 일마즈를 섭외할 때였다. 이 감독이 특별출연을 요청하자 “내가 왜 이 역할을 해야 하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감독은 “섭외가 무산될 수도 있는 긴박한 순간 짧게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다”고 말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던 것 같아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의 비유, 영화 속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개자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떻게 그렇게 막힘없이 이야기했는지 놀라울 정도였죠.” 진심은 통했고 이탈리아 국민 배우는 출연을 흔쾌히 승락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두오모) 대성당 촬영도 난관의 연속이었다. 상업 영화를 위해 성당 내부 촬영이 허가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세라 일마즈는 당시 심장 수술을 받은 지 불과 2주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직접 성당 관리인을 찾아가 설득까지 했다.

날씨마저 기도 응답 같았다고 했다. 이 감독은 “피렌체에 머무는 대부분 비가 내렸고 중요한 야외 촬영을 앞두고도 폭우가 쏟아졌다”고 했다. 촬영을 포기하고 철수하려는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이 감독은 “까짓거 뭐, 하나님이 해주시겠지”라고 외치며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큐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비가 뚝 그쳤던 경험이 있습니다. 허가받은 2시간 동안 성당 촬영을 무사히 마쳤고 종료 시각을 15분 남기고 촬영을 끝내자마자 다시 비가 쏟아졌습니다.”

삶의 가치와 신을 재발견한 주인공
영화 피렌체의 주인공 석인(오른쪽)이 이탈리아에서 노숙인과 대화하는 장면. 이 감독 제공

영화는 치열하게 살아온 중년 남성 석인(김민종)이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30년 전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떠나는 내용을 담았다.

이 감독은 “단테가 열망했던 천국의 이상과 구원의 메시지를 피렌체의 성당과 같은 공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며 “단테가 절망 속에서 천국을 보았듯 석인의 여정을 통해 관객들도 위로와 평안, 희망을 찾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이탈리아 청년 엔조(해리 벤자민)는 “신이 언제 올지 어떻게 알아”라는 석인의 냉소적인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침착해. 신이 우릴 부를 거야. 침착할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 엔조는 석인이 삶의 가치와 신을 재발견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석인은 과거 내 모습 투영”

석인은 이 감독의 삶이 투영된 캐릭터이기도 하다. 영화계에 입문하기 전 대기업에서 12년간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1등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 속에 살았다는 그는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영화계에 뛰어든 후에도 성공을 위해 자신을 혹사시켰다고 했다.

이 감독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성인이 된 뒤 ‘선데이 크리스천’이 됐다”며 “성공에 집착하느라 신앙과 가족 등 소중한 걸 놓치고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에서야 90세가 된 아버지가 매일 새벽 3시 30분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걸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영화 일을 하다 보면 신앙이 흔들릴 때도 있고 매 순간 성령 충만하게 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습니다.”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