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기입니다. 오늘날 대림절은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되지만 16세기 유럽에서는 훨씬 길었습니다. 당시에는 11월 11일(성 마르틴의 날)부터 1월 6일(주현절)까지, 주일과 축일을 뺀 장장 40일을 대림절기로 지켰습니다. 예로부터 대림절은 사순절과 마찬가지로 금식과 자선을 경건의 중요한 지표로 삼아왔기에 사순절 40일과 합치면 1년 중 80일, 여기에 교회가 신실한 교인의 기준으로 삼던 수요일과 금요일 금식까지 더하면 1년의 삼 분의 일은 굶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대림절을 ‘작은 사순절’이라 부른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금식의 풍경이 참 희한합니다. 금식할 때 육식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묘한 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육고기는 안 되지만 물에 사는 동물은 괜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식 기간에 비버와 수달이 더 많이 잡아먹혔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금식 기간에 맥주를 허용했고 양조장을 갖춘 수도원은 금식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재정이 풍성해졌습니다. 비버 고기 먹고 맥주 마시면서도 자신이 경건하게 금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사야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이사야 58장에서 백성이 따집니다. “어찌하여 우리가 금식하는데도 주님은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대답이 날카롭습니다. “너희가 금식하면서 오히려 힘없는 사람에게 온갖 일을 시키고 서로 다투고 악한 주먹으로 치는구나.” 곡기를 끊으면서도 이웃을 착취하고 억울한 자의 호소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사 58:6~7) 성경이 가르치는 금식의 정신은 분명합니다. ‘나의 굶음’이 아니라 ‘이웃의 배부름’을 지향하는 것, 내 배를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를 비워 이웃의 배를 채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탄 준비는 어떤가요. 혹시 화려한 트리와 분주한 행사에 취해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나눔의 정신은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버는 물에 사니까 육고기가 아니라고 우기던 그 시대 사람들처럼, 우리도 교묘한 자기합리화로 양심을 속이며 사는 것은 아닌지요. 평화를 노래하면서도 전쟁의 소식에 무감각하고 이웃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우리 곁의 가난한 이들에게는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은 아닌지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밤이 깊었다는 건 바로 불의와 악에 무감각한 우리의 현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달려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진짜 경건은 다가오는 그 빛을 향해 삶의 모든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의 신앙을 걷어내고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 굶주린 자와 양식을 나누고 억눌린 자의 결박을 푸는 것, 이것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가장 거룩한 채비입니다. 이 찬란한 성탄, 우리 모두 그 빛을 향해 깨어 걸어가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
◇중앙루터교회는 종교개혁 전통을 이어가는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입니다. 경건한 예배 가운데 임하는 안식의 힘으로 일상을 살아가게 만드는 데 온 교우가 마음을 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