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우리가 기대한 대법원장

입력 2025-12-09 00:38

지난 1년간 점잖은 이들의 거짓말을 너무 많이 봤다. 저런 사람들이었구나. 내란 재판 중계를 보면서 차원이 다른 실망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래도 대법원장이 문서로 준비해온 공개 발언에서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다. 거짓말이라는 내 말이 허위라고 반박할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거짓말의 정의에 비춰보자면 대법원장 말은 거짓말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 3일 대통령실의 5부 요인 오찬에서 “사법부는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직후 그것이 반헌법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하였다”고 말했다. 내 기억에 계엄과 관련해서 사법부에서는 직후에도, 그 뒤로도 단호한 규탄 발언 같은 건 나온 적이 없다. 모두가 사법부 수장의 입을 쳐다본 며칠이었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보도에 따르면 그날 밤 대법원 분위기도 대법원장 주장과는 달랐다. 계엄 직후 언론에는 대법원 비상간부회의에 대한 기사가 줄을 이었다. 회의에서는 계엄령에 따른 형사재판의 관할권 문제를 논의한다고 했다. 보도 중에는 ‘사법권이 계엄사령관에게 옮겨간다’는 전언도 있었다. 발언자가 대법원 관계자라는 걸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말이다. 법 해석에 관한 대한민국 최고기관의 관계자가 비상계엄의 법적 효력을 전제로 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말은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도 했다. 그는 지난 10월 대법원 국감에서 ‘계엄이 합법적이었다면 따라야 될 조치’를 언급했다. 가정법 뒤에 숨기는 했으나 대법원 간부들의 논의 주제 가운데 계엄 성공의 시나리오가 포함돼 있었음은 추측할 수 있다.

공식 반응이라고 단호했던가. 대법원의 첫 공식 메시지는 새벽 법원 내부망에 올라온 천 처장 명의의 4줄 ‘말씀’. 요약하자면 “계엄 해제에 안도한다”였다. 대법원장 발언은 더 짧았다. 출근길 기자 질문에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다”고 말한 게 전부. 사법부의 첫 ‘위헌’ 언급은 8일 뒤에야 나왔다. 그것도 대법원장이 아니라 천 처장이 국회에서 의원들의 다그침에 ‘위헌적인 군 통수권 행사’를 말한 게 최초였다. 그 후에도 대법원장 명의의 공개 메시지는 없었다. 그러고는 1년 뒤 뜬금없이 오찬장 발언이 나온 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한 적 없는 자신의 발언을 허공에 대고 인용한, 알 수 없는 저 문장 말이다.

그때 대법원이 단호했다면 우리가 여태껏 이런 불안에 시달리고 있을 리가 없다. 대법원장이 상정한 가상현실처럼 사법부가 정말로 계엄 직후에 계엄이 반헌법적 행위라고 천명했더라면. 권한과 권위를 모두 가진 그들이 그날 밤 양쪽에 발을 담근 채 일이 어디로 풀려갈지 눈치를 보는 대신 헌법 수호를 위해 움직였다면. 국민들 앞에 서서 비상계엄의 불법성을 확인해줬더라면. 그랬더라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거다. 내란죄 피고인과 조력자들이 법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일도, 판사와 재판이 모욕당하고 희화화되는 일도 벌어졌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누구도 처벌받지 않은 채 시민들이 다시 12월을 맞았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대법원의 무책임과 부작위가 남긴 후유증은 그들 대신 우리 모두가 1년 넘게 온몸으로 겪고 있는 셈이다.

내란전담재판부를 둘러싸고 사법부의 반발이 거센 걸로 전해진다. 위헌성 논란이 제가된 부분에 대해서는 신중한 토의와 조정 과정을 거치는 게 바람직하겠다. 논란과 별개로 반성과 사과 대신 사후 알리바이로 얼버무리는 사법부의 태도는 남는다. 그들의 말처럼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다. 1년 전 내란이 성공했더라면 말이다. 그걸 막아낸 이들의 목소리에 사법부는 귀를 기울여야 마땅하지않겠나.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