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 처음엔 “거대한 폭발” 조롱 받아
대중 인기에 의미 불분명해도 쓰여
블랙홀, 애초 ‘붕괴된 별’ 등으로 불려
‘암흑 물질’… 임시 명칭이 굳어지기도
대중 인기에 의미 불분명해도 쓰여
블랙홀, 애초 ‘붕괴된 별’ 등으로 불려
‘암흑 물질’… 임시 명칭이 굳어지기도
현대 우주론의 패러다임은 빅뱅 우주론이다. 1929년 에드윈 허블이 우주 공간 자체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관측적으로 증명하면서 빅뱅 우주론은 현대 우주론의 표준이 됐다. 우리말로는 대폭발 우주론이라고 한다.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의 이벤트를 빅뱅이라고 한다. 우주가 탄생하면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공간이 커지기 시작한다. 138억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주는 계속 커졌다. 현재 우주의 나이는 138억살이다. 우주가 얼마나 더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더 커질지 추정은 하고 있지만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우주가 커지면서 우주의 평균 밀도와 온도는 낮아진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물질로 변하는 진화 과정이 일어난다. 빅뱅 우주론은 말하자면 팽창하는 우주 속의 변화를 따지는 우주 진화론이다.
‘빅뱅’이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쓰인 것은 아니다. 허블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을 발견할 당시 우주론의 패러다임은 정상상태 우주론이었다. 우주가 어느 특정한 시점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계속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 정상상태 우주론의 핵심이다. 한동안 빅뱅 우주론과 정상상태 우주론이 경합하고 있었다.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정상상태 우주론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고 이 이론을 지지했다. 그는 천문학자로서 업적을 쌓는 한편 SF 작가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또한 천문학을 일반인에게 알리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호일은 영국 BBC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빅뱅 우주론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물론 이때는 빅뱅 우주론이라는 말이 없었다. 방송 중에 호일은 우주가 팽창한다는 허블의 발견을 조롱하는 의미로 우주가 거대한 폭발 즉 ‘빅 뱅 (Big Bang)’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역설적으로 빅뱅이라는 말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널리 쓰이게 됐다. 과학 논문에서도 허블이 발견한 팽창 우주를 나타낼 때 빅뱅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팽창 우주론 또는 원시 원자 가설 대신 빅뱅 우주론이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빅뱅이라는 이름은 우주의 시작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말이다. 폭발이라는 말은 자칫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다. 우주는 폭발을 통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주가 탄생하면서 팽창을 시작했다. 1993년 과학 저술가인 티모시 페리스가 빅뱅 우주론 대신 정확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용어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했다. 그의 제안에 교양 천문학 잡지인 ‘스카이 앤드 텔레스코프(Sky & Telescope)’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빅뱅 우주론을 대체할 새로운 이름을 공모했다. 1만3000개 이상의 제안이 쏟아졌다. 페리스도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심사위원들은 빅뱅 우주론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이름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당선작을 내지 않았다. 빅뱅 우주론이라는 말이 이미 널리 퍼졌고 간결하며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바꾸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 공모전을 통해 빅뱅 우주론이라는 말의 문화적 대중성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그러나 빅뱅 우주론이라는 말은 여전히 모호한 면을 간직하고 있다. 우주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면 알수록 빅뱅이라는 말에는 그 정보의 의미를 담기에는 부족함과 모호함이 더 커져만 간다. 하지만 빅뱅 우주론을 대체할 강력한 용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빅뱅 우주론이라는 말을 대체할 정확하고 명확한 용어를 찾아야 한다는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빅뱅이라는 말을 대체할 말을 찾기 힘든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문화적 얽힘은 빅뱅 우주론을 더 강력한 용어로 만들어가고 있다. 빅뱅 우주론의 의미를 그래도 잘 표현하는 말 중 하나는 상대론적 팽창 우주론일 것이다. 허블이 관측을 통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우주 공간 자체가 수축과 팽창을 할 수 있다는 걸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말도 문화적 관성의 힘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 같다.
블랙홀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물리적인 의미가 담긴 ‘붕괴된 별(Collapsed Star)’ 또는 ‘얼어붙은 별(Frozen Star)’ 같은 용어로 쓰였다. 1967년 무렵 존 휠러가 블랙홀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널리 쓰이게 됐다. 우리말로 번역해 검은 구멍으로 쓰기도 한다. 블랙홀 또는 검은 구멍이라는 말이 블랙홀의 물리적 의미를 포괄하지 못하면서 다소 음란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이유로 블랙홀을 다른 용어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빅뱅 우주론이나 블랙홀이나 학술적으로는 모호한 용어지만 과학을 향유하는 일반인들에게는 간결하고 매력적인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춰진 질량(Hidden Mass)’ ‘사라진 질량(Missing Mass)’ 또는 ‘신비의 물질(Mystery Matter)’ 등으로 불리던 것이 ‘Dark Matter’ 즉 암흑 물질이라고 불리는 것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시작됐다. 암흑이라는 말이 자칫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오해될 수도 있어서 다른 용어를 찾아봤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Dark Energy’ 즉 암흑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아직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일단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암흑 물질과 헷갈리기도 하고 음침한 느낌을 준다는 비판이 있다. ‘우주 에너지(Cosmic Energy)’ 같은 용어가 제안되고는 있지만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암흑 에너지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과학 용어는 그 물리적 실체가 완전히 파악되기 전에 붙여지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그 물리적 의미가 파악되더라도 이미 문화적으로 굳어진 용어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다소 모호하더라도 문화적으로 확립된 용어는 당분간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때 다른 용어를 생각해 보자는 미련은 남는다.
이명현 과학콘텐츠그룹 갈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