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전 척화비는 쇄국의 상징이었다. ‘화친은 매국’이라며 변화를 거부한 대가는 혹독했다. 2025년 오늘, 금융 현장에서 제2의 척화비를 목격한다. 미국발 ‘디지털 달러’ 공습에도 한국은행은 “직접 통제하지 않는 돈은 위험하다”며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빗장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화폐에서 ‘관치 만능주의’가 시장에 먹히지 않는 것은 중국 ‘디지털 위안화(e-CNY)’ 사태가 이미 증명했다. 막대한 보조금에도 인민들은 국가 감시인 ‘빅브라더’ 공포에 이를 외면했다. 한은이 실패한 중국식 중앙 주도 모델을 답습하려 해 우려가 크다.
첫째, ‘시중은행 중심으로 발행해야 통화 컨트롤이 된다’는 한은의 논리는 시대착오적이다. 겉으로는 안정을 말하지만 실상은 본연의 통화정책 권한이 민간의 혁신으로 인해 위협받는 것을 막으려는 구태의연한 관치적 발상이 아닌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세계적 흐름은 정반대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은 통화정책의 교란자가 아니라 국채 수요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혈관’임이 입증되고 있다. 테더사의 미 국채 보유량은 이미 독일을 추월해 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정책을 떠받치고 있다. 스티븐 미란 연준 이사조차 “스테이블코인은 미 국채의 구조적 매수자로서 통화 안정을 돕는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공언했다. 미국의 금리를 결정하는 연준 이사가 인정한 ‘우군’을 한은만 ‘적’으로 간주하는 꼴이다.
둘째, 은행이 발행 컨소시엄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한은의 주장은 혁신의 싹을 자르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과거 은행과 합작했던 ‘뱅크월렛카카오’가 은행권의 보신주의(송금 한도 제한, 복잡한 인증 절차 고수) 때문에 고사한 사례를 보라. 이후 은행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나온 ‘토스’나 ‘카카오페이’가 성공한 것과 극명히 대비된다. 은행 주도 컨소시엄은 카카오페이나 한패스 같은 경주마의 발목에 낡은 규제와 보신주의라는 모래주머니를 채우는 격이다.
셋째, 스테이블코인의 미래를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인프라와의 연계’라는 틀에 가두려는 한은의 구상은 어불성설이다. 한은이 야심차게 추진한 ‘CBDC 활용성 테스트’(프로젝트 한강)조차 민간 수요 부재와 은행권의 낮은 관심으로 동력을 잃은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자체 동력조차 상실한 미완성 인프라에 민간 혁신을 가두려는 것은 조직 안위를 위해 국민 편익을 희생시키는 기관 이기주의다.
미국 지니어스 법안 통과 후 국내 투자자의 달러 스테이블코인 구매가 급증하고 있다. 빗장을 건 사이 국민은 미국산 ‘디지털 달러’에 종속되고 있다. 최근의 고환율 위기에 기름을 붓는 격이나 당국은 수수방관이다. 한은은 ‘통제해야만 안전하다’는 환상에서 깨어나 시장의 자정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 지금 당장 여의도 앞의 보이지 않는 금융 척화비를 뽑아 버려라. 그것만이 금융 주권을 지키는 길이다.
문철우 성균관대 교수·디지털자산금융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