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핵심 안보정책 문서에서 나란히 ‘한반도 비핵화’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대북 정책 키를 쥔 주요 2개국(G2)의 중대한 변화를 시사한다. 전문가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북한을 본토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보기보다는 핵 개발을 진행 중인 북한과도 대화로 유연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으로 분석했다. 반면 미·중 주요 문서에 대만 문제가 주요하게 다뤄지면서 향후 한국의 역할 확대가 요구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유지훈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7일 통화에서 미 백악관이 지난 5일(현지시간)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에 대해 “북핵 문제를 비핵화, 평화체제보다 억제와 제재, 군사적 관리 중심으로 굳히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여러 차례 ‘뉴클리어 파워’로 부른 상황에서도 새 NSS에 한반도 비핵화 문구가 빠진 건 북핵의 현실을 인정하고 관리 유지에 집중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NSS에는 “(미국은) 통치 체계와 사회가 다르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유연한 현실주의)는 표현도 적시됐다. 김재천 서강대 교수는 통화에서 “핵보유국 인정을 원하는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말했다.
다만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이번 (NSS) 문서는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를 중심으로 기술해 주요 현안을 세부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며 “향후 하위 문서에서 다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역시 ‘신시대 중국의 군비 통제, 군축 및 비확산’이라는 안보정책 관련 백서에 한반도 비핵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2023년 이후 시작된 기류 변화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는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모든 나라의 정당한 안보 우려를 존중해야 한다’며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했다”며 “비핵화는 미국과 북한이 협상해야 할 문제로 남겨놓겠다는 취지”라고 말했다.
한국도 최근 비핵화 대신 ‘핵 없는 한반도’라는 표현을 내세우며 북한의 대화 테이블 복귀를 타진하고 있다. 통일부 관계자는 “내년 초 9차 당대회에서 북한이 내놓을 메시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북한이 핵무력 증강으로 몸값을 키웠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과의 ‘군축 스몰딜’ 담판에 나서려 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핵 없는 한반도로 나아가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대북 구상도 차질을 빚게 된다. 유성옥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사장은 “북·미 대화로 한반도에 훈풍이 분다면 좋지만 그 과정에서 북핵을 용인한다면 우리는 폭탄을 둔 바람과 악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중국의 해양 진출 요충지인 ‘제1 도련선’ 방어와 대만해협 분쟁 억제를 우선 강조한 것도 한국에는 부담이다. 당장 서태평양에서 군사적 주둔을 강화한다는 미국 구상에 따라 지역 동맹국인 한국의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안보·전략적 기여를 요구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박준상 최예슬 기자 junwit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