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곳에서 자면 입 돌아간다’… 농담이 아니었네

입력 2025-12-09 02:50
부쩍 추워진 날씨에 안면신경 마비 발병에 더욱 신경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안면마비 환자는 다른 계절에 비해 겨울철에 더 많이 발생하고 특히 60대 이상 고령층에서 흔한 것으로 보고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추위 보다는 면역력 저하가 더 큰 요인
조기 치료시 80~90% 원래 상태 회복
후유증 수개월~수년 이상 이어져
심리 위축 함께 삶의 질 저하 유발
진단·치료 등 조기에 적극 대처 필요

날씨가 추워지면서 안면신경 마비 ‘경고등’이 켜졌다. 평소와 달리 한쪽 얼굴이 뻣뻣해지거나 눈이 잘 감기지 않고 입이 비뚤어지는 증상이 생길 수 있다. 흔히 ‘입이 돌아갔다’고 하는 안면신경 마비가 겨울에 더 많이 발생한다는 속설은 실제로 통계적 근거를 갖고 있다. 2008~2020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안면마비 진료 자료 분석 결과 1월의 월평균 발생률은 6월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다. 지난해 월별 진료 환자 수를 봐도 12월(1만5848)과 1월(1만5882명)이 다른 계절(7월 제외)에 비해 더 많았다. 추위 자체보다는 겨울철 큰 실내외 온도차로 인한 신체적 스트레스, 연말연시 과로, 독감 등으로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이 더 큰 요인이라는 게 전문가 설명이다.

겨울철뿐만 아니라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 쉽게 찾아올 수 있다. 문제는 안면마비를 겪어도 막연한 불안감 속에 여러 병원은 전전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안면마비 치료의 골든타임은 증상 발생 후 72시간 이내다. 이 시기를 놓치면 회복이 더디고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스트레스·과로로 증가 추세

안면신경 마비는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안면신경 손상으로 발생한다. 이 신경은 뇌에서 시작해 귀 속의 좁은 뼈관을 지나 얼굴의 여러 표정근을 지배한다. 신경 자체의 염증이나 감염, 압박, 외상 등으로 경로 중 일부가 손상되면 마비가 온다. 가장 흔한 유형은 특발성인 ‘벨 마비’로, 전체 안면마비의 60~70%를 차지한다. 평소 몸에 숨어있던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재활성화로 인한 염증 반응과 부종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대상포진 바이러스 감염(안면마비의 일종인 램지-헌트 증후군 유발), 중이염, 머리 외상, 뇌졸중·뇌종양, 혈류 장애 등도 원인이 될 수 있다. 드물게 당뇨병이나 자가 면역질환, 라임병과 연관되기도 한다.

안면마비회복클리닉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장면. 하나이비인후과병원 제공

보건복지부 지정 전문병원인 하나이비인후과병원 이제연 안면마비회복클리닉 과장은 8일 “안면마비는 생각보다 훨씬 흔한 질환”이라며 “인구의 약 1.5%가 평생 한 번쯤 경험하고 60대에서 발병률이 가장 높다.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는 현대인이 늘면서 증가 추세”라고 말했다. 안면신경이 마비되면 갑자기 한쪽 얼굴 혹은 얼굴 아래쪽의 움직임이 제한되는 증상이 생긴다. 한쪽 입이 움직이지 않아 말하거나 웃을 때 어색함을 느끼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지 않는다. 또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아 건조감이나 이물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런 안면 움직임이 비대칭적으로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경희대병원 신경과 오성일 교수는 “뇌종양이나 뇌졸중 등 중추성 요인일 땐 주로 아래쪽 얼굴에 마비가 생기며 이마 주름은 유지되지만 복시(사물이 두 개로 보임), 걸음걸이 이상 등 다른 신경학적 이상 증상이 동반된다”고 설명했다.

심한 안면마비는 일상을 완전히 뒤바꾼다.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아 먼지가 쉽게 들어가고 잠자는 중에도 눈을 뜬 채로 지내야 해 각막 손상과 시력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고 눈 시림 증상도 자주 겪는다. 입술이 잘 닫히지 않아 발음이 부정확해지고 식사·양치질할 때 음식물이나 물이 흘러내려 외식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일들이 하나하나 큰 불편으로 다가온다. 이 과장은 “무엇보다 거울 속 낯선 얼굴과 마주할 때 받는 충격이 크다. 표정을 짓는 모든 시도가 좌절로 이어지고 점차 자신감도 잃게 된다”고 말했다. 심각한 경우 회복이 시작되는 초기부터 ‘연합 운동’이 나타나기도 한다. 표정근이 비정상적으로 재연결돼 웃을 때 눈이 감기거나 음식을 씹을 때 눈이 깜빡이는 등 원치 않는 움직임이 동반되는 식이다.

“초기 신속한 치료가 회복의 열쇠”

벨 마비를 비롯해 대다수의 안면마비는 발병 후 즉시 혹은 수일 내에 조기 약물 투여와 물리 치료 등을 받으면 약 80~90%는 발병 전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 증상을 느낀 즉시 이비인후과 전문의 등을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고 72시간 이내에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회복의 열쇠이자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오 교수는 “드물긴 하지만 안면마비 후유증은 수개월에서 수년 이상 이어져 대인 기피증·우울증 등 심리적 위축과 삶의 질 저하를 유발할 수 있는 만큼, 신속한 진단과 정확한 치료를 받도록 조기에 적극 대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안면마비의 초창기 치료는 항바이러스제와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병용해 염증을 가라앉히고 신경 손상을 최소화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국내 환자들은 한의학 치료를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벨 마비 환자의 69%가 최초 치료를 한의원에서 시작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약물 거부감, 수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한방은 자연스럽고 부작용이 적다’는 믿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방, 침 치료 자체가 무용한 것은 아니다. 일부 연구에서 침 치료가 보조요법으로 후유증 예방과 신경 회복에 도움 될 수 있다고 보고돼 있다. 다만 약물 치료와 병행됐을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 강동경희대병원 침구과 연구팀의 최근 국제 학술지 발표를 보면 안면마비 환자에 대한 스테로이드와 한약 병용 치료의 안전성이 입증됐다.

이제연 과장은 “문제는 처음부터 한의학 치료에 의존하는 흐름이 이어지면 안면마비 발병 후 ‘72시간 내 급성기, 3주 내 아급성기 치료’라는 중요한 시기를 놓치게 만들 수 있다”면서 “초기 치료가 늦어지면 회복 속도는 물론 예후 자체가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병원급에선 이례적으로 안면마비회복클리닉을 최근 개설한 하나이비인후과병원은 급성기 고압산소 치료, 회복기 보톡스 치료, 심미적 교정 치료까지 단계별 치료를 한 곳에서 진행하고 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