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휴일] 연민

입력 2025-12-05 00:08

연못 위에 눈이 내렸다
연못은 죽은 사람인 척 흰 천을 머리끝까지
끌어 덮어쓰고 연못이 아닌 척 눈을 감고 있었다

겨우 살얼음을 깔고 있는 주제에
소양강댐도 아니고 손바닥만한 연못 따위가
죽은 척하다니

나는 돌 하나를 주워 연못에 던지면서
교미하기 싫을 때 사지를 뻗고 죽은 척한다는
개구리처럼 연못도
엄살을 부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연못은 맛있게 돌을 삼키고는
다시 죽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며칠 동안 또 눈이 내렸다
연못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눈이 내렸고
노랑어리연꽃의 발목이 물속에서 배리배리하게 얼어붙어도
눈이 내렸다

연못의 맥을 짚을 수 없고
연못을 구해줄 밧줄도 없고
연못을 흔들어 깨울 자신도 없는
내가 죽어도 연못에는 눈이 내릴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니 정말 무척이나 편안해졌다

연못도 나처럼 편안하게 죽어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날 나는 연못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백지 위에 한 줄을 썼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을 쓰고 나니
나는 더 편안해졌다

나는 가까스로 죽은 연못 위에 제대로
돌 하나를 던져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얼음장을 깨뜨릴 수도 없고
연못 바닥까지 내려갈 수도 없는
그 어떤 무게도 없는 돌 하나를

- 안도현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