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걸친 조선 사랑, 결핵 퇴치 마중물 되다

입력 2025-12-05 03:06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홀 일가의 묘비 모습. 조선에 태어나 대를 이어 의료선교사로 활동한 셔우드 홀을 포함해 3대에 걸친 홀 가문 6명의 유해가 묻혀있다. 국민일보DB

대한결핵협회가 매해 성탄절을 앞두고 출시하는 ‘크리스마스 실(seal)’을 아는지요. 이를 국내에 최초 도입한 인물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셔우드 홀(사진·1893~1991) 박사입니다. 홀 박사는 부모를 따라 2대째 의료선교사로 이 땅에 살며 결핵 퇴치에 진력했습니다.


홀 박사 가족의 의료 선교 이야기는 그가 쓴 자서전 ‘닥터 홀의 조선회상’(좋은씨앗)에 상세히 담겼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홀 박사는 캐나다 토론토의대 졸업 후 의사인 아내와 1925년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조선인에게 불치병이자 악귀의 저주로 여겨진 결핵을 퇴치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엔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지내던 한국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의 사망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홀 박사의 어머니이자 여성 의료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의 제자 박에스더는 미국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 후 귀국해 보구녀관(이화여대 의료원 전신)에서 근무하다 폐결핵으로 숨집니다. 홀 박사가 당시 느낀 소회입니다. “에스더와 그가 사랑한 수많은 동족의 생명을 앗아간 병, 나는 이 병을 퇴치하는 데 앞장서기로 했다.”

홀 박사는 조선 땅에서 이미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캐나다 의료선교사인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1860~1894)은 평양에서 청일전쟁 부상자를 치료하다 전염병에 걸려 숨졌습니다. 4년 뒤엔 여동생 에디스도 이질로 잃습니다. 연이은 비극에도 그의 어머니 로제타 홀의 헌신은 이어졌습니다. 여성 의료인력을 양성했고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 등을 세우며 당대 약자인 여성과 장애인을 43년간 보듬었습니다.

어머니처럼 홀 박사 역시 질병, 특히 폐결핵으로 고통받는 조선인을 도왔습니다. 1926년 황해남도 해주 구세병원에 원장으로 부임한 그는 여러 난관에도 2년 만에 결핵 환자 위생학교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설립합니다. 홀 박사를 무엇보다 힘들게 한 건 결핵을 운명으로 보는 당대 인식이었습니다. “‘(폐결핵 환자는) 형벌 받은 사람인데 어째서 그들의 운명을 방해하는가’라고 사람들은 반문하곤 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결핵 환자에 대한 잔인한 처우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

결핵 인식 개선과 치료비 모금을 위해 그가 1932년 추진한 크리스마스 실 사업은 순식간에 대중 운동으로 확산했습니다. 허나 크리스마스 실은 1940년 발행이 잠정 중단됩니다. 일제가 홀 박사에게 영국 측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운 탓입니다. 그는 무죄한 자신에게 내린 엉터리 판결에 분노했지만, 가산을 정리해 벌금을 내고 미국 뉴욕 선교부의 제안을 받아 인도로 선교지를 옮깁니다.

인도에서 결핵 퇴치에 나서다 1963년 은퇴 후 캐나다에 정착한 그는 대한결핵협회 초청으로 1984년 방한했습니다. 그해 정부는 모란장 훈장을, 서울시는 명예 시민증을 수여했습니다. 이때 부모와 여동생이 묻힌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들른 그는 “나는 지금도 한국을 사랑한다.…내가 죽거든 이 땅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는데요. 현재 묘역엔 그와 아내뿐 아니라 아들 부부도 함께 묻혔습니다.

그의 꿈과 소망이 어린 크리스마스 실은 올해도 발행됐습니다. 실을 구매하며 우리 민족의 건강을 위해 평생을 바친 홀 일가의 희생을 기억해보는 건 어떨까요.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