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아파트 관련 뉴스는 대개 흉흉한 것들이다. 층간소음으로 이웃이 서로 몸싸움을 벌이고, 무개념 주민이 경비원을 향해 도 넘는 갑질을 해 논란이 됐다. 정부가 역대급 규제를 쏟아냈지만 서울 집값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치솟는 물가를 방어할 만한 유일한 안전 자산인 부동산에 쏠리는 관심은 더 커지는 형국. 모두가 그렇게 남들처럼 살기 위해 아파트만 쳐다보는데, 정작 그 안에선 사람 냄새 나지 않는 소식만 흘러나온다.
서울 강남 압구정 현대아파트 사례는 오래간만에 전해진 미담이었다. 일부 매물이 100억원대에 거래되는 이 아파트 주민들은 최근 십시일반 돈을 걷었다. 급성 백혈병에 걸린 관리사무소 직원의 치료비 지원을 위해서다. 3300가구 가운데 약 850가구가 동참했고, 금세 1억원 넘는 돈이 모였다. 파편화 혹은 분절화된 관계가 일상인 요즘, 문득 이 놀라운 단합의 원동력이 궁금해졌다. 아무리 형편이 넉넉해도 남을 위해 선뜻 지갑을 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수성가로 강남에 입성한 한 취재원의 말에서 조그마한 해답을 찾았다. 20대부터 주식을 시작한 그는 남들보다 빠르게 집을 샀고, 몇 차례 성공적인 점프 끝에 40대에 서초동에 안착했다. 가족 모두가 착실히 절약하고 버티며 말 그대로 온 힘을 다해 도달한 자리였다. 그는 “이웃들도 대부분 그렇게 버티고 모으며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서로에게 더 마음이 가고, 믿음이 생기고, 묘한 동질감과 동지애가 자연스럽게 싹텄다는 얘기. 각자 잃을 게 많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층간소음을 비롯한 이웃 간 분쟁도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잘사는 동네, 아파트 이웃 간의 유대감은 통계로도 드러난다. 서울연구원의 2012년 조사를 보면 ‘우리 동네’의 범위를 묻는 질문에 강남·서초 주민의 절반 가까이(47.2%)가 ‘아파트 같은 동’을 꼽았다. 지난 13년 동안 껑충 뛴 집값만큼 그들의 동질감은 더 크고 단단해졌을 터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개인이 위험을 오롯이 떠안는 시대’로 규정했다. 과거 국가나 조직이 감당하던 위험이 이제 개인에게까지 번지고 있고,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믿을 만한 선택된 공동체를 찾아 나서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고가 아파트에 사는 일부 한국인에게 이웃 커뮤니티는 서로의 삶과 자산을 지탱해주는 일종의 집값 공동체로 자리 잡은 셈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등장은 사람을 보는 눈부터 바꿔놓고 있다. 가문과 문벌, 학력과 직업, 소득처럼 시대마다 계층과 계급을 가르는 장치는 달라져 왔지만 이제 가장 강력한 기준은 사는 아파트다. 특정 단지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 경제력, 생활방식, 가치관까지 어느 정도 읽힌다는 믿음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아파트는 새로운 신분표가 돼 가고 있다. 비슷한 조건하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결속이 바깥을 향할 때,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된다.
최근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는 단지 내 보행로를 막은 데 이어 외부인에게 ‘질서유지 부담금’을 부과하겠다고 공지했다. 전동 킥보드와 자전거는 20만원, 흡연·반려견 배설물 미수거 등은 10만원을 매기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보행로는 인근 학교와 지하철역을 오가는 학생과 구민이 매일 이용하는 사실상의 생활 통로였는데, 단지 주민이 아니면 지나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명분이 짙어질수록 사회 전체의 연대는 되레 흐려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박세환 뉴미디어팀장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