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국·일본의 자동차 시장은 자국 중심 소비 성향이 강해 내수 브랜드가 꽉 잡고 있다. 미국은 관세 등 여파로 여전히 불확실성이 넘쳐난다. 이 때문에 유럽은 완성차업체들이 상품성만 놓고 치열하게 진검승부를 벌이는 시장으로 꼽힌다.
업체별 판매량 차이도 촘촘하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에 따르면 지난해 유럽 자동차 판매량 3위 BMW(77만4925대)와 10위 현대자동차(53만4360대)의 차이는 24만대 정도에 불과하다. 이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유럽 국가는 독일과 프랑스, 둘이다. 지난해 유럽 판매량 ‘톱10’에 오른 독일 브랜드는 폭스바겐(1위), BMW, 메르세데스 벤츠(6위), 아우디(7위)가 있다. 프랑스 브랜드는 르노(5위)와 푸조(8위)가 이름을 올렸다. 큰 차를 선호하는 한국에선 프랑스 브랜드들이 고전하고 있지만 실용성 중심의 유럽에선 사정이 다르다. 비교적 최근에 한국에 출시된 프랑스 차인 르노 전기차 ‘세닉 E-테크 100% 일렉트릭’과 푸조 ‘3008 스마트 하이브리드’를 연달아 시승했다. 둘 다 준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다.
세닉은 르노가 한국에 가장 먼저 출시한 전용 전기차다. 기본 모델이 프랑스에서 3만7990유로(약 6400만원)에 판매된다. 한국에 들여올 땐 운송비와 관세 등이 더 붙을 텐데 보조금을 적용하면 5159만원으로 오히려 1000만원 이상 싸다.
앞부분은 세로로 긴 마름모 형태의 르노 로고가 그물망처럼 펼쳐져 있다. 먼저 뒷좌석에 앉았다. 내부 천장은 유리로 돼있다. 버튼을 누르면 선루프를 열고 닫는 것처럼 유리에 순차적으로 암막이 쳐진다.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다. 중앙 팔걸이(암레스트)를 내리면 수납공간과 컵홀더 외에 별도 핸드폰 거치대가 나온다.
준중형 차급치고 1열 시트와 다리 사이 공간(레그룸)도 여유롭다. 여러 면에서 뒷좌석 승객을 위한 배려가 돋보인다. 르노코리아는 세닉을 설명하는 자료의 맨 앞부분에 주로 큰 차에 붙이는 수식어인 ‘패밀리카’와 ‘다목적차량’(MPV)이란 사실을 강조했다. 덩치에 비해 실내 공간이 여유로워 아이를 ‘라이딩’(등하원 지원)하기 적합해 보였다.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적잖은 자동차는 팔걸이가 너무 낮아서 운전대(스티어링 휠)를 잡은 상태에서 팔이 팔걸이에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닉은 적당한 높이에서 팔을 받쳐줬다.
계기판은 가로형, 중앙 디스플레이는 세로형이다. 에어컨이나 열선 등 꼭 필요한 기능은 디스플레이 아래에 물리버튼으로 남겨뒀다. 다만 통풍시트와 내장 내비게이션이 없다는 점은 아쉽다. 환경부 인증 주행거리는 443㎞다. 유럽에서 ‘2024 올해의 차’를 수상했다.
일주일 뒤 푸조 3008을 타고 서울 마포에서 충남 당진까지 왕복 약 208㎞를 주행했다. 도로를 달리는 동안 꽤 많은 이들의 시선이 차량을 향하는 걸 느꼈다. 마치 사자가 할퀸 것 같은 형태의 헤드램프는 3개의 라인이 사선으로 그어져 있다. 실내 디자인도 세련됐다. 디스플레이가 대시보드에 붙어 있지 않고 살짝 공중에 살짝 떠 있다. 그 뒤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물리버튼이 센터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팔걸이 쪽에 있다.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켜둔 채 기능을 조작할 수 있었다. 3008은 연비를 속이는 걸로 유명하다. 공식 연비는 ℓ당 14.6㎞인데, 늘 더 높은 효율이 나와서다. 주행을 마친 뒤 확인한 연비는 ℓ당 14.6㎞였다.
디스플레이를 조작하다보니 ‘고양이 발 마사지’ 가능이 있었다. 안마의자와 비교하면 압이 세지 않은데, 고양이 ‘꾹꾹이’(고양이가 앞발로 꾹꾹 누르는 행동)라고 생각하면 만족스럽다. 가격은 고급 모델인 GT가 4990만원(개별소비세 혜택 적용 전)이다. 2017년 출시됐던 2세대 모델과 같다. 전 세계에서 가장 낮게 책정했다고 한다. 쿠페 형태 디자인 탓에 뒷좌석은 조금 좁은 편이다. 세닉이 3·4인 가족에게 적합하다면 아이가 없는 부부에겐 3008이 나을 것 같다.
운전 성능은 세닉과 3008 모두 최근 탔던 독일 차들과 확실한 차이가 느껴졌다. 독일 차는 다이내믹한 고속주행이 특징이라면 프랑스 차는 조향에 강점이 있다. 운전대를 돌리면 원하는 위치에 정확히 앞바퀴가 놓였다. 독일은 속도 무제한의 아우토반이 있고, 프랑스는 구불구불한 길이 많다는 지형적 특징이 이런 차이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국서 판매량은 독일 차가 월등히 앞서지만, 사실 가속 구간이 많지 않은 한국 도로는 독일 차보다 프랑스 차가 더 적합하다. 한국 시장에서 프랑스 차는 과소평가됐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