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올해의 한마디

입력 2025-12-05 00:34

연말에 기억할 만한 것 중
나에게 꽂힌 문장 파악하면
지금 내 마음 알 수 있을지도

“수집하는 물건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맥시멀보다는 미니멀리스트에 가깝기 때문에 수집 욕구는 전무하다. 모으는 거라고는 손편지 정도일 텐데, 매일 쌓이는 건 아니니 공간을 조금도 차지하지 않는다. 반면 매일 반드시 지우는 것은 있다. 지워도 지워도 항상 쌓이는 메일,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찍는 휴대폰 속 사진. 그렇다면 나는 정말 수집력, 혹은 욕망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타인의 말을 좀체 흘려듣는 법이 없다. 마음에 꽂히는 말이 있으면 즉각 머릿속 혹은 휴대폰 메모장에 살포시 저장한다. 매일 글감이 필요한 처지이기도 하지만, 통찰이 듬뿍 담긴 누군가의 한마디로부터 삶을 견뎌낼 힘을 얻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는 말을 모아요. 문장 수집가죠.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니 부담 없이 모을 수 있어요. 단, 영양가 있는 문장이라야 좋죠. 때때로 무례한 말이 잊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모아지기도 하지만요.” 답을 듣던 상대는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들은 한마디가 뭐냐고 물었다.

한 달 전, 도서관에서 들은 이야기. “취업이 잘되던 시기에 대학을 졸업해 운 좋게 회사에 취직했고, 결혼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결혼을 했고, 운이 좋아서 두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는 말. 노년에 접어들면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한 사람의 자기소개였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퍽 놀랐다. 누군가가 보기엔 매우 평범한 삶의 여정,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두고 “운이 좋았다”는 말을 거듭했다. 그는 3년 전 암 진단을 받고 퇴직 후 다양한 취미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 나는 지금까지 내 삶을 이야기할 때,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는 말이 옳을지도. 좋은 일이 생기면 내 노력에 따른 응당한 결과라고 생각했고, 나쁜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따져 물었다. “왜, 하필 저에게 이런 시련을. 도대체 어떤 깨달음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나는 운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인생이라 생각했기에 “운 좋게도”라는 말이 무척 낯설었다. 4주간의 글쓰기 수업을 하는 동안 나는 그의 고요하고도 깊은 눈망울을 여러 번 쳐다봤다. 자신의 삶을 담담히 마주하는 태도, 긍지, 확신을 배우고 싶었다. 전염되고 싶었다.

요즘 나의 화두는 아름답게 나이 드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하는 일이다. 젊은 사람들의 줏대 있는 행동을 고깝게 여기지 않고 일단 들어보려고 하는 사람,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 유머와 농담을 잃지 않는 사람, 가끔은 손해볼 줄 아는 사람, 자신이 어른이라는 걸 자각하고 사는 사람 곁에 머물고 싶어서 주변을 자꾸 두리번거린다.

초등학교 교사로 명예퇴직 후 뜨개질부터 영화 감상, 독서 모임, 드로잉, 글쓰기까지. 취미 부자가 된 글친구는 “중년 이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나의 질문에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라고 답했다. “중년 이후에는 대개 떠나가는 것들만 생각하며 우울해하는데,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중년이든 노년이든 모두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했다.

연말이다. 곧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연말 결산도 해야 하고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과 송년회도 할 것이다. 올해의 책도 꼽아보고 한 해 동안 봤던 공연, 영화, 드라마 중 최고였던 작품도 선정하며 기억할 만한 사건들을 기록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다. ‘올해의 말’을 뽑아보는 일. 누군가 스치듯 한 말도 좋고 책 속에서 발견한 문장도 좋고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유튜브 영상 댓글도 좋다. 왜 이 문장이 나에게 꽂혔는지를 파악하다 보면 불현듯 깨달을지 모른다. 지금 내 마음의 상태, 고민, 방향 같은 것들이.

엄지혜 작가·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