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문고리 권력

입력 2025-12-04 00:40

조선 시대 승지(承旨)는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장과 제1부속실장 기능을 모두 합쳐 놓은 존재였다. 왕에게 어떤 보고서를 들이는지, 누구를 만나게 할지, 어떤 말이 왕에게 전달되는지를 모두 통제했다. 조선 왕조는 이 같은 승지의 ‘문고리 권력’이 커질 경우의 위험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3~6개월마다 교체하고,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토록 했다. 중국 역시 황제의 문서를 다루던 황문시랑(黃門侍郞)을 어사대가 견제토록 해 비선 권력화를 막았다. 권력의 가장 안쪽이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통제해왔다.

이 오래된 문고리 권력 통제 얘기가 다시 떠오른 것은, 그제 국회 예산안 처리 중 본회의장에서 잡힌 텔레그램 대화 내용 때문이다. 문진석 더불어민주당 원내운영수석부대표가 김남국 대통령실 디지털소통비서관에게 특정인을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장에 추천하며 그가 중앙대 후배이자 대통령의 도지사 출마 당시 대변인을 지냈음을 언급했다. 이에 김 비서관은 “네 형님, 제가 훈식이 형이랑 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고 답했다. 어투에 긴장감은 없고 대학 동문회나 동아리 단톡방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문제는 누가 봐도 대화 속 ‘형’과 ‘누나’가 강훈식 비서실장과 대통령 일정·의전·가족 동선을 총괄하는 김현지 제1부속실장임을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권력 문고리를 쥔 자리에서 학연을 기반으로 한 인사 추천이 논의되는 순간, 조선과 중국이 승지와 황문시랑을 감시했던 이유가 되살아난다.

우리는 이미 박근혜정부의 ‘문고리 3인방’을 통해 이런 구조가 어떤 파국을 부르는지 지켜봤다. 정호성·안봉근·이재만이 공식 절차를 우회해 비선을 국정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면서 국정 전체가 흔들렸다. 문고리가 사적 관계에 점령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국가적 리스크다. 대통령실은 “내부 직원에 엄중 경고했다”고 했지만, 이 사안은 단순한 실수나 해프닝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권력의 문 앞은 언제나 취약하다. 그 문을 어떤 원칙으로 여닫느냐가 국가의 품격을 결정한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