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카이로 근교 기자 지역에 이집트 대박물관이 지난달 1일 공식 개장했다. 2005년 공사 시작 이후 20년 만이다. 성경 독자나 교사 상당수는 이집트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 없이 창세기나 출애굽기, 레위기 등을 다룬다. 그러나 이집트의 문화와 역사적 맥락을 알고 있다면 출애굽 스토리는 더 가깝게 다가올 것이다. 대박물관은 이집트를 무대로 전개되는 성경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바로(파라오)의 궁정 문화나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 배경 등이 이집트의 영향을 짙게 반영한다. 창세기 37장부터 출애굽기 17장의 무대는 고대 이집트 중왕국과 신왕국 시대에 걸쳐 펼쳐진다. 필자는 지난 2월과 10월 대박물관 공식 오픈에 앞서 둘러봤다.
대박물관 마당에 자리 잡은 높이 15.5m 화강암 재질의 오벨리스크는 성경에서 애굽 땅 벧세메스의 ‘주상(柱像)’으로 기록돼 있다.(렘 43:13, 이하 개역한글) 주상이란 단순한 돌기둥이 아니라 태양신 라를 칭송하는 오벨리스크를 뜻한다. 그랜드 홀에 들어서면 11m 높이, 무게가 83t이나 되는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왕관에 새겨진 독수리와 코브라 형상이다. 이 둘은 파라오의 수호신이자 상징이었다.
파라오를 연상시키는 그림 언어 중 하나는 뱀이었다. 하나님이 파라오에게 가는 것을 거부하는 모세 앞에서 그의 지팡이를 뱀이 되게 하고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한 이야기(출 4:2~4)는 강력한 그림 언어였다. 신들의 석상에서 아몬 라의 형상이나 하토르 여신의 모습을 찾는 ‘보물찾기’를 시도할 수 있다. 하토르 여신은 붉은 털을 가진 암소 여신이다. 박물관 초입의 대계단을 따라 60여개 정도 되는 돌 조각상을 관찰하며 파라오와 애굽 신의 어우러짐을 관찰할 수 있다. 대계단의 전시물과 주전시실 본관의 전시물에서 조각상과 부조에 새겨진 수많은 신의 형상을 살펴보자. 십계명에 나오는 신들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출 20:3~5)을 떠올릴 수 있다.
수많은 전시물 가운데 단연 주목할 곳은 7번 홀 옆 구별된 공간에 자리한 투탕카멘 유물 전시실이다. 이곳 전시물 가운데 파라오의 보좌 앞에 놓인 발받침대(발등상)에 주목해야 한다. 그곳에는 이집트의 적대 국가들을 인종적 특성에 따라 인물로 새겨 놓았고 두 손이 결박된 모습으로 놓여 있다.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시 110:1)라는 표현이 어떤 느낌인지 묵상할 수 있다.
정복과 지배의 이미지는 파라오의 오른손에서도 발견된다. 발걸음을 돌려 주전시실 벽화나 부조물에 새겨진 파라오의 높이 올려진 오른손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오른손’ ‘강한 오른팔’ 등의 묘사는 정복과 지배를 나타낸다.
대박물관에서는 고대 이집트인의 옷차림도 찾아볼 수 있다. 남자들이 입던 치마(쉔티)의 유형을 살피면서 요셉이 보디베라(보디발)의 아내에게 옷을 잡혀 도망친 사건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남녀상에서는 주로 여자가 남자의 왼쪽에 자리하는데, 남자는 정적인 자세로 묘사되는 반면 여자는 남자의 허리나 어깨에 손을 얹는 등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자의 오른손에 쥐어진 물체가 가장의 권위와 권세를 상징한다 하더라도 여성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감안할 때 출애굽 광야 공동체의 여성을 단순히 수동적이거나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풀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낡은 관습을 뒤로하고 떠난 광야의 공동체는 남녀 관계에 있어서 이집트와 비슷하거나 한 걸음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출애굽 여정의 대열에서 미리암이 앞장서는 장면(출 15:20)이나 슬로브핫의 딸들이 상속권을 행사하는 장면(민 27장) 등은 눈길을 끈다.
전시실에서는 다양한 관(棺)과 미라의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야곱(창 50:2~3)과 요셉(창 50:26)도 미라로 만들어졌는데 각 관의 측면에는 두 개의 눈동자가 새겨져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자의 영생을 지켜주는 신의 보호를 이렇게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런 문화에 익숙했던 출애굽 세대와 이집트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다윗 왕국 시절 백성은 하나님께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 17:8)라는 말씀을 당대의 시각적 은유를 통해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