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환율 대응, 은밀하고 묵직하게

입력 2025-12-04 00:38

환율에 관한 전통적인 외환 당국의 개입은 짧고 굵직한 것이었다. 지난해 4월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돌파했을 때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의 구두개입은 단 두 문장이었다. “환율 움직임, 외환 수급 등에 대해 각별한 경계감을 가지고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나친 외환시장 쏠림 현상은 우리 경제에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반해 최근 열흘간 환율 대응은 장황하고 임기응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발단은 국민연금을 활용한 환율 안정 방안 검토였다. 지난달 24일 기재부·보건복지부·한은·국민연금이 4자 협의체를 구성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국민 노후를 위한 자산이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타당하냐는 지적이었다. 그러자 이틀 뒤 구윤철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예정에 없던 기자간담회를 열고 “외환시장 안정과 국민연금 수익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뉴 프레임워크’ 구축 논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환율 상승에 대한 일시적 방편으로 국민연금을 동원하려는 목적은 전혀 아니다”고 했지만 해외주식 투자 세제 강화 여부를 놓고서는 메시지 혼선을 초래했다. “현재로선 검토하고 있지 않지만 얼마든지 (여지가) 열려 있다”는 모호한 말은 여러 해석을 낳았고, 일부 언론은 ‘정부가 해외주식에 추가 과세를 검토한다’고 보도했다. 불안이 확산하면서 급기야 온라인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을 사칭해 해외주식 양도소득세율을 인상한다는 가짜 대국민 담화문이 나돌았다.

구 부총리 간담회 다음 날 이창용 한은 총재는 4자 협의체가 필요한 이유를 긴 시간을 들여 설명했다. “(국민연금이) 해외로 돈을 많이 가져갈 때는 원화 가치 절하, 가지고 들어올 때는 절상이 발생한다. 환헤지 등으로 수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지만 “젊은 분들이 ‘쿨하다’며 해외투자를 많이 해서 유행처럼 커진다”는 발언은 또 다른 논란을 일으켰다. 개인투자자들은 왜 고환율을 ‘서학개미’ 탓으로 돌리느냐며 한은 총재를 성토했다. 당국의 증권사 대상 해외투자 실태 점검도 반발을 낳고 있다. 투자를 과도하게 조장하고 유도했는지 살펴본다는 취지지만 증권업계는 지나친 개입이라며 질색한다.

결국 최근 대응은 여러 논란과 혼선을 일으키고 시장과 투자자의 반발만 부른 모양새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진정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환율은 1460원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당국의 ‘점검’에 따라 증권사들이 해외주식 마케팅을 축소할 수 있지만 이것이 환율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부는 수출기업의 환전 실태도 점검하고 정책자금 지원과 연계하겠다고 했는데 기업들이 순순히 달러를 원화로 바꿀 것 같지도 않다.

지금 환율 수준이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고환율 상황이 계속되면 석유류 등의 수입 가격이 올라 물가 상승을 압박한다. 수출 대기업은 환차익을 누릴 수 있지만 원부자재를 납품하는 중소기업과 내수기업은 원가 상승 부담을 떠안게 돼 경제 내 양극화가 더 깊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구두개입도 효과를 내지 못한다고 하니 당국의 위기의식이 매우 클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조성된 흐름을 거스르고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거친 메시지와 효과가 의심되는 전방위적 대책은 시장 참가자들에게 불안함을 안길 뿐이다. 고환율 문제의 본질은 ‘원화를 들고 있기 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투자처로서 한국의 매력이 떨어졌다는 데 있다. 단기간에 생긴 문제가 아니므로 대응도 장기적이어야 한다. 은밀하고 묵직하게 시장 조정자의 역할을 해온 모습을 외환 당국이 되찾길 바란다.

권기석 경제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