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탄소 경쟁력의 승부처는 국경 너머 에너지 접근성
국내는 기술·고부가 허브로 해외는 저탄소 원료 기지로
철강 대전환의 골든타임 지금 국가적 결단 필요하다
국내는 기술·고부가 허브로 해외는 저탄소 원료 기지로
철강 대전환의 골든타임 지금 국가적 결단 필요하다
한국 철강산업이 거대한 전환의 문 앞에 서 있다. 산업화 시대 ‘철강보국’의 상징이자 경제 버팀목이었던 철강은 이제 수요 둔화, 중국산 저가 공세, 전력 비용 상승, 탄소중립 압력이라는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 국내 제조업 탄소 배출의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탈탄소는 기술 과제가 아니라 산업의 생존 문제다. 하지만 현재의 국내 생산체제로는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 핵심 기술로 꼽히는 수소환원제철은 기술 자체보다 외부 여건이 더 큰 걸림돌이다. 경쟁력 있는 그린수소 확보는 여전히 요원하고, 재생에너지 인프라와 송전망 제약도 전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석탄 기반 제철과 경쟁하려면 수소 가격이 ㎏당 1달러 초반대로 내려가야 하지만 현실은 몇 배 수준이다. 결국 국내에서 기술만으로 탈탄소를 완성하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뚜렷하다. 과거에는 값싼 에너지와 규모의 경제가 경쟁력이었지만 에너지 패러다임이 바뀐 지금은 오히려 약점이 됐다. 저부가·고에너지 구조를 유지하는 한 탄소중립 시대의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이제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서 만들 것인가”다. 이미 세계 주요 철강 기업들은 이런 전략 전환에 나섰다. 일본제철은 미국 US스틸 인수로 값싼 에너지, 풍부한 전력, 강한 수요가 결합한 시장으로 생산 기반을 옮기고 있고, 아르셀로미탈과 티센크루프도 캐나다·중동·호주 등 재생에너지 부국에서 환원철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철강 경쟁력의 축이 전통적 조업 기술에서 ‘저탄소 에너지 접근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최근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을 내놓아 과잉 설비 조정, 고부가·AI 기반 제조 혁신, 전기로·저탄소 공정 확산 등을 추진하고, 국회는 여야 합의로 ‘K스틸법’(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키며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다만 이 대책들은 ‘국내 생산 기반을 유지한 채 설비 조정과 전환 기술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 한국 철강의 근본 병목인 ‘저탄소 에너지 접근성’ 열위를 완전히 해소하긴 어렵다. 국내 그린수소·재생전력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아지지 않는 한 수소환원제철의 상업적 경쟁력 확보는 힘들다. 즉 정부안이 “전환을 촉진하는 필요조건”이라면 “생존을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직 남아 있다.
한국 철강도 이런 흐름을 외면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내 완결 생산체제를 고수하기보다 국내와 해외의 역할을 분담하는 ‘투 트랙 글로벌 허브 전략’을 현실적 대안으로 검토할 시점이다. 국내는 고부가가치 강재와 자동차·에너지용 소재, 첨단 연구·개발(R&D)·AI 기반 공정 혁신의 중심지로 점진적으로 전환하고, 해외는 풍부한 재생에너지와 철광석을 활용해 그린수소·환원철을 생산하는 전초기지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즉 국내는 기술·부가가치 허브로, 해외는 저탄소 에너지 기반 원료 생산지로 기능하는 새로운 글로벌 분업체계를 단계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에너지 제약이 큰 국내 환경을 극복하면서도 고용과 산업 기반을 지킬 수 있다. 동시에 해외에서 안정적·저비용으로 그린수소·환원철을 확보해 국내 고부가 제품 생산을 강화하는 선순환도 기대된다. 철강산업이 저탄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구조적 해법이다.
그러나 기업의 노력만으로 이 전략을 현실화하긴 어렵다.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첫째, 국내 고로 감축과 연계한 인센티브 제공, 고품질 고철 수거 체계 고도화, 전기로 확산을 위한 전력 믹스 저탄소화 등 구조조정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해외 철강 허브 구축을 위해 정책금융·세제지원·외교협력을 묶은 ‘K스틸 글로벌 특별법’ 수준의 실행 패키지를 가동할 필요가 있다. 셋째, 그린철강 시장을 창출하는 정책이 필수다. 배출권 거래제 실질화, 공공조달 의무화, 탄소등급제 도입과 구매 보조제 연계 등을 통해 ‘그린 철강이 팔리는 시장’을 만들어야 기업도 움직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간이다. 이 골든타임을 놓치면 한국 철강은 새롭게 재편되는 에너지 패권 질서 속에서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지금 결단한다면 기술력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결합한 새로운 철강 강국으로 재도약할 수 있다. 철강의 미래 해법은 국경 너머까지 시야를 넓혀 찾아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전환을 실행할 마지막 기회다.
윤제용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