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보다 중·러와 밀착… 트럼프 ‘즉흥 외교’ 불안한 지구촌

입력 2025-12-06 00:05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0월 30일 부산 김해국제공항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악수하며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직통전화를 받았다. 시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국은 대만에 대한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떤 형태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과 미국은 세계 질서를 관리해야 한다. 서로 협력하자”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 통화를 마친 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대만 주권 문제로 중국을 자극하지 말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 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단독 보도한 내용이다. 다카이치 총리가 일본 의회 질의에서 “대만이 군사적 공격을 받는다면 이는 일본 안보와도 직결될 수 있다”며 일본의 군사 개입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한 압박이었던 셈이다.

WSJ는 정통한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가 직접적으로 다카이치에게 대만 관련 발언을 철회하라고 압박하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를 낮추라고 했다”고 전했다. 집권 초기부터 반중국을 기치로 내걸었음에도 트럼프는 오랜 동맹인 일본 편이 아니라 중국 편에 선 셈이다. 신문은 “트럼프 본인의 갈팡질팡하는 외교 행보가 행정부 전체가 마련한 세계 전략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진단했다.

中 봉쇄 전략 스스로 갉아먹어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라인은 한반도 비핵화 및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 전략을 대폭 수정했다.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주한미군의 역내 재배치, 전략적 유연성 강화를 통해 중국의 태평양 진출 의지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으로 기본 전략을 바꾼 것이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주한미군에 변화가 필요하다”며 “그 변화는 병력 등 숫자에 대한 게 아니라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재평가해 중국의 대만 장악 시도를 원천봉쇄한다는 게 국무부와 국방부의 동아시아 전략이다.

최근 중·일 갈등을 촉발시킨 다카이치의 대만 관련 발언도 이 같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왔다. 대만 유사시 일본의 역할을 원론적으로 설명한 다카이치는 트럼프 행정부의 지지를 받을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트럼프로부터 “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식의 질책을 받은 것이다. 트럼프가 시 주석 편에 선 것은 미·중 무역협상 때문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의 분석이다. 중국이 강력한 무기로 휘두르는 희토류 수출통제 조치를 막고, 주요 지지층인 농민들을 위해 미국산 대두의 중국 수출을 보장받기 위해선 시 주석 편에 서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국면에서 일본 다카이치 내각이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한국 정부는 물론 필리핀, 대만까지도 트럼프 행정부의 동아시아·태평양 전략을 믿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외교라인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 야욕을 꺾는 데 외교·군사적 역량이 집중된 상황에서 정작 트럼프 본인이 중국과 더 밀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트럼프와 시진핑 통화, 다카이치와의 통화가 보도된 뒤 “우리는 중국과 매우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언급했다.

종전 협상서 유럽 안보는 뒷전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8월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맞이하는 모습. AP뉴시스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에 나선 트럼프의 행보 역시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전체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애초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해온 트럼프가 친서방 국가인 우크라이나보다 러시아에 유리한 협상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백악관 특사인 스티브 위트코프가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궁 외교정책보좌관과 통화하면서 우크라이나 영토를 양보받으라는 취지의 조언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이 마련한 종전안 초안도, 종전 협상을 이끄는 특사도 러시아 입장에 기울어 있던 셈이다.

이후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고위급 협상을 통해 기존 28개항의 종전안을 19개항으로 축소한 수정안을 도출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와 유럽이 반발한 사안들은 삭제되거나 전쟁 당사국 정상 간 회담에서 논의할 사안으로 보류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러시아는 자국에 유리한 종전안 수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2일 한 포럼에서 “그들(유럽)이 시도하는 트럼프의 제안에 대한 변경은 전체 평화 프로세스를 막기 위한 것”이라며 “그들은 잘 알면서도 러시아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러시아가 수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종전은 어렵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뒤 미국은 유럽을 독려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무기 지원을 조율해 왔다. 하지만 미국에서 정권이 교체된 뒤 자꾸 러시아 편에 서는 모습을 보이자 유럽 각국은 미국이 안보 우산을 제공한다는 그동안의 공식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됐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폴란드부터 이탈리아, 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 남유럽 국가들까지 군비 확장에 나섰다.

외교안보 싱크탱크와 전문가들은 미국의 외교전략 전체가 트럼프의 즉흥적 행보로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자신과 지지층의 이익 여부에 따라 언제든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트럼프의 태도가 동맹국들의 불안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유럽과 동아시아는 미국의 정치·외교·군사·경제적 이익에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라면서 “두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전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변함없이 지속돼 왔지만 트럼프 2기 집권 후 모든 게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