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안전하고 더 효율적인… ‘무인선박 시대’ 머잖았다

입력 2025-12-04 02:12
HD현대 아비커스의 대형선박용 자율운항 솔루션 ‘하이나스 컨트롤’이 적용된 에이치라인해운 선박이 항해를 하고 있다. 하이나스 컨트롤은 항해 장비와 센서에서 제공되는 정보를 통합해 선박의 방향과 속도를 자동으로 제어하는 인공지능(AI) 기반 자율 항해 시스템이다. HD현대 제공

지난달 19일 오후 8시17분 전남 신안 해상을 항해하던 여객선 퀸제누비아호가 무인도인 족도와 충돌해 좌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선장이 자리를 비우고 조타실을 책임지는 일등항해사가 운항에 집중하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딴짓을 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 선박이 스스로 위험을 감지하고 즉각 방향을 돌리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선장과 선원 없이도 스스로 운항하는 선박이었다면 어땠을까. 사고는 애초 발생하지 않았고 부상자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똑똑한 선박이 머지않아 현실에 등장할 수 있다. 글로벌 조선업계는 이미 자율운항 선박 기술을 경쟁적으로 연구하며 ‘무인선박’ 시대를 향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자율운항 선박은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각종 센서 등 첨단 기술을 융합해 선원 없이도 알아서 최적 항로를 설정하고 항해할 수 있는 차세대 선박을 말한다.

자율운항 선박 260조 성장 전망

자율운항 선박은 미래 해양 모빌리티 산업을 주도할 ‘게임 체인저’로 불린다. 안전과 효율, 친환경 등 해운산업이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자율운항은 선원 부족 문제와 충돌위험 최소화 이슈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이다. 세계 해운업계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항해 중 발생하는 사고 대다수는 선원의 실수나 근무 태만 등 인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영국 해운 전문 컨설팅기관인 드류리는 2027년 전 세계 선원 공급 부족 규모가 5만500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선박이 날씨와 항구 상황 등을 계산해 스스로 항로를 수정하고, 최적의 속도로 운항해 연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무인선박 시대에 진입하면 선원 거주 공간, 통로, 안전 장비 등이 필요 없어진다. 해당 공간에 화물 등을 더 실을 수 있어 운항 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인건비 부담도 줄게 된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자율운항 시스템은 안전성, 효율성, 친환경성, 인력 운용 측면에서 조선·해운 산업의 미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자율운항 기술 획득을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등 다수의 국가가 정부 주도로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다. EU는 2012년부터 선박 자율운항을 위한 ‘무닌’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일본 정부 역시 자율운항기술, 디지털 선박기술 개발을 국가전략사업으로 지정한 상태다. 중국은 국영 조선소 주도로 광둥성 주하이에 자율운항 선박기술을 실증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글로벌 조사업체 어큐트마켓리포트는 글로벌 자율운항 선박 시장 규모가 올해 1101억 달러에서 2032년 1805억 달러(약 265조원)로 앞으로 7년간 63.9%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은 2020년부터 1603억원을 투입해 자율운항 선박 레벨3에 해당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목표는 2032년까지 레벨4 수준의 자율운항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6034억원을 투입한다. 자율운항 선박은 선원이 의사를 결정하는 레벨1부터 완전 무인 자율운항 수준인 레벨4까지 4단계로 구분된다.

자율운항 선점 노리는 K-조선

HD현대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 ‘빅3’도 자율운항 기술 선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선제적 대응을 통해 미래기술을 확보하고 ‘무인선박’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중공업의 자율운항 연구선박 시프트 오토가 거제 앞바다를 항해 중이다. 삼성중공업 제공

삼성중공업은 2019년부터 자체 자율운항 솔루션인 ‘SAS’(Samsung Autonomous Ship)를 개발해왔다. 레이더 등과 AI 기반 카메라 영상을 통해 주변 상황을 인식하고 엔진과 러더(방향타)를 제어해 충돌을 피한다. 지난 8월에는 대만 에버그린 소속 1만5000TEU급 컨테이너선에 탑재해 실증을 마쳤다. 미국 오클랜드항을 출발한 선박은 약 1만㎞의 태평양 구간을 시험 항해하는 데 성공했다. SAS는 3시간 단위로 날씨를 분석하고 항로 조건에 맞춰 가이드를 제공했다. 삼성중공업은 최근 대만 에버그린 본사에 ‘삼성 원격 운용센터’도 열었다. 이는 원격으로 선박 정보와 장비 상태를 실시간 확인해 효율적인 장비 점검과 유지 보수를 지원하는 일종의 컨트롤타워다.

대만 에버그린 본사에 개소한 ‘삼성원격 운용센터’ 모습. 삼성중공업 제공

HD현대는 ‘아비커스’라고 불리는 자율운항 전문 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2018년 HD현대 내 자율운항 연구실에서 출발해 2020년 사내 벤처 1호로 출범했다. 회사 이름은 바이킹을 뜻하는 ‘아비커(Avviker)’에서 따왔다. 아비커스는 2020년 4월 대형 상선에 탑재하는 항해 보조 시스템을 개발했고, 2023년 6월 대양횡단에 성공했다. 2단계(일부 원격제어) 자율운항 솔루션인 ‘하이나스 컨트롤’을 상용화하기도 했다. 이 기술은 탄소 배출량 15%를 저감하고, 연료 효율 15%를 향상할 수 있다고 한다. HD현대는 소형 레저보트용 자율운항 솔루션 ‘뉴보트’도 개발해 2023년 9월 공식 출시한 바 있다.


한화오션은 2021년 자율운항시험선 ‘한비’를 개발했으며, 2022년 서해 제부도 인근 해역에서 해상 시험을 마쳤다. 한화오션은 자율운항 기술을 실제 선박에 탑재해 검증·보완할 수 있는 전용선을 건조하고, 테스트베드로 활용하는 중이다. 또 미국 AI 자율운항 기업 해벅AI와 손잡고 해양무인체계의 자율운항 및 원격 운용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다만 자율운항 선박의 상업화 단계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 관계자는 3일 “비상상황에 대응 가능한 통신이 원활한 지역의 내수면에서는 2030년부터 자율운항 선박이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며 “대양 운항은 2035년 이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