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메뉴는 장어덮밥이었다. 백이면 백, 출판사 측에서 계산할 게 뻔했다. 내가 아무리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지만 그 비싼 장어를 맨입으로 얻어먹을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장어에 상응할 만한 선물을 사러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렇게 찾은 백화점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했다. 올해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한 해 동안 무얼 했는지 돌이켜보니 바삐 일한 것이 전부였다. 아, 참! 새롭게 얻은 것도 있기는 있다. 일정에 맞춰 몸을 혹사하다 보니 알레르기를, 운동을 뒷전으로 하다 보니 뱃살을 얻은 것이다. 근질근질한 뱃살을 벅벅 긁으며 생각했다. 아이고, 내가 죽어야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선물을 사고, 빨리 장어덮밥을 먹은 다음, 빨리 병원에 가서 알레르기 진료를 받고, 빨리 일터로 돌아와 일해야 했다. 다행히도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빨리빨리 움직인 덕에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지막 목표인 ‘빨리 일터로 돌아와 일하기’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익숙한 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그런데 길바닥에 누워 있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나뭇가지에 앉아 있어야 할 새가 바닥에 누워 있다는 말인즉, 유명을 달리했다는 뜻이었다. 그 새를 차마 지나치지 못한 건 작년에 내가 죽인 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였다. 지금과 같은 길을 걸어 일터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도 작은 새 한 마리가 길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세상에, 새가 죽었네!’ 하고 안타까워할 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퇴근길에 거듭 마주한 새의 모습에 나는 다시 한번 탄식했다. ‘세상에, 새가 아직도 있잖아!’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행동과 생각을 반복했으나 대엿새쯤 되던 날에는 그 새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그러던 어느 퇴근길, 물컹한 무언가가 발바닥에 밟혔다. 새였다. 나의 육중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져 있었다. 죽은 새를 또 죽인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범인은 현장을 다시 찾는 법, 나는 그 길을 오가며 내가 죽인 새를 이따금 떠올렸다. ‘내가 너를 화단으로 옮겨줬더라면 나한테 밟히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한평생 자유로이 날아다니다가 고작 나 따위 인간에게 짓밟혀 인생의 마지막을 처참히 마무리하다니.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너 같은 새를 만나면 꼭 화단으로 옮겨줄게.’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인지, 그로부터 꼭 일 년이 지나 그때와 같은 자리에 누워 있는 새를 마주한 것이다. 여아 일언 중천금, 여자의 말은 천금처럼 무거우니 내가 죽인 새에게 했던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마음과는 다르게 내 발은 앞으로 나아갔다. 죽은 새를 만질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무거운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해 멈추고야 말았다. 같은 자리에 새가 죽어 있는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 같았다. 네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라고, 알 수 없는 존재가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 분명했다. 새에게 돌아간 나는 가방 속에서 휴지를 꺼내 들었다. ‘운명하셨습니다.’ 환자의 머리끝까지 흰 이불을 끌어 올리는 드라마 속 의사처럼 새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며 휴지를 덮었다. 휴지로 감싼 새를 들어 올렸다. 작디작은 새는 공기처럼 가벼웠다. 인적 드문 어느 화단 깊숙한 곳에 새를 내려놓았다. 그동안 사느라 고생했네.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서 훨훨 날아다니렴. 혹시 내가 죽인 새를 만나면 미안하다고 전해줘.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일터로 향하는 길, ‘만회’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국어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당길 만(挽), 돌아올 회(回). 후회스러운 순간을 당겨서 돌아오게 한 다음 바로잡을 기회를 준다는 뜻일까. 나에게 돌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은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만회의 숨은 뜻을 알고 나니 12월 다음이 13월이 아니라 1월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그건, 작년과 같은 365일을 선사하여 하루하루 만회할 기회를 주려는 누군가의 선물일 것이다.
내가 아무리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지만 이 귀한 선물을 맨입으로 받을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지. 하늘을 향해 감사 인사를 올렸다. 고마워요, 내년에는 꼭 뱃살 빼고 건강해질게요.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