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가 세상을 떠났다. 연예계 후배들의 추모와 대중의 반응을 보면 그의 죽음은 한 원로 배우의 부고에 그치지 않는다. 존경할 만한 어른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또 한 명의 어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헛헛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순재는 “예술엔 완성이 없다”며 평생 끊임없이 노력한 배우였다. 그의 유작이자 2024년 KBS 연기대상을 안겨준 드라마 ‘개소리’ 촬영 당시 그는 왼쪽 눈은 거의 안 보이고, 오른쪽 눈도 잘 안 보이는 상태였다고 한다. 소속사 이승희 대표는 당시 이순재가 큰 소리로 대본을 읽어 달라 하고, 그걸 들으며 외우겠다고 하는 모습을 볼 때 제일 마음이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평생 연기를 위해 술·담배를 하지 않고, ‘NG’는 물론 ‘대충’이나 ‘적당히’도 허락하지 않았던 배우는 이렇게 마지막까지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다.
이순재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했다. 70대에 도전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80대에 선택한 예능 ‘꽃보다 할배’, 평생 꿈꿔온 연극 ‘리어왕’까지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주저함 없이 실행에 옮겼다. 나이가 들면 출연 기회가 줄어드는 걸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찾아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태도로 임했다. “나이 먹었다고 어른 행세하며 대우받으려 주저앉아버리면 늙는 것”이라던 그의 말은 나이 듦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촬영장과 연습실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었지만, 나이를 앞세워 먼저 찍거나 일찍 연습을 끝내는 등의 ‘특혜’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순재는 후배나 제자들이 원칙과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따뜻하게 열려 있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배우 김명민은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촬영 당시를 떠올리며 “치매가 온 악기 연주자 역의 선생님을 악단에서 쫓아내는 장면이었는데, 그때 제 표정은 1%도 계산하지 못한, 선생님이 연기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나온 표현이었다”고 했다. 또 “선생님과 연기 이야기를 하면 3~4시간이 순식간이었다. 친구, 동료, 교수님 누구와도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기억했다. 함께 일하는 상대방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진지하게 소통하며, 새로운 자극을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고백의 가치를 알 것이다.
‘할배’라는 호칭 앞에 ‘꽃보다’라는 말을 붙여도 괜찮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도 그였다. 여행 예능 속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낯선 환경에서도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거침없이 직진했다. 알고 있던 옛날 지식을 꼰대처럼 늘어놓는 대신 여전히 배울 게 많다고 말하는 ‘멋진 어른’의 얼굴을 보여줬다. 그와 함께 여행한 이서진은 “선생님 아들과 동갑이지만, 늘 배려해주셔서 선생님과는 세계여행도 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순재처럼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본업에 충실하며, 겸손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어른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는 존경할 만한 어른을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됐다. 정치·사회 분야 곳곳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 그에 걸맞은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 도덕적 실패, 책임은 회피한 채 특권만 앞세우는 이들의 모습은 그들에 대한 실망을 떠나 누군가를 ‘존경’하는 행위 자체마저 무의미한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다음 세대가 찾아가 배움을 청할 만한 어른이 또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그저 한 명의 배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오래전부터 놓치고 있던 ‘어른의 기준’, ‘어른의 품격’일지 모른다.
김나래 문화체육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