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만으로 부족해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이중삼중의 철통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무장된 초연결사회에서 우리는 과거보다 더한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보여주기식 위선과 거짓된 관계 속에서 느끼는 허기 때문일 것이다. 24시간 연결돼 있어야 불안함을 떨칠 수 있고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가 주는 단절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오히려 고독이 주는 유익을 찬미했다. 작가나 화가들의 위대한 작품도 오랜 세월 인고와 고독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지난 세기 영향력이 큰 사상가들 중 상당수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상태가 외로움이라고 했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가 의미를 찾는 존재이지만 의미 없는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외롭다고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인간은 고독을 따르는 저 수많은 권태와 불만 그리고 무료함의 대가로 자신의 내면과 자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15분을 손에 넣는다. 인생의 지루함에 어느 정도 대안을 구축한 인간은 자신의 불필요한 자아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대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샘물을, 그 힘찬 생명을 그는 결코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우주가 “디자인도, 목적도, 악과 선도 없고, 맹목적이고 인정사정없는 무관심만”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외롭다고 했다.
고독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온 우주에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과 적막감을 느낄 때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예수회 사제이자 영성 신학자인 헨리 나우엔은 저서 ‘삶의 영성’에서 “고독이란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것이다. 우리 삶 속에 그런 공간이 존재하는가”고 묻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우선 고독 속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게 먼저다. 다음은 사람들과의 교제, 즉 사명을 함께 실천할 공동체와 더불어 거하는 것이다. 끝으로 그 공동체가 나가서 치유하고 기쁜 소식을 전파한다. 고독과 공동체와 사역, 이 세 가지 훈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공간을 내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활동하시고 말씀하실 수 있는 공간을 내어 드리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주님과 동행할 때 늘 내게 행복과 평안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고독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뿐 아니라 자신의 참 자아를 만난다”고 했다. 우리를 ‘내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을 그 고독 속에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엔은 ‘너의 가치와 쓸모를 입증하라’ ‘뭔가를 보여주라’와 같은 세상의 다른 음성들도 많이 있다며 이런 음성들은 매우 위력적이고 아주 바쁜 삶으로 우리를 몰아간다고 했다. 세속적인 삶이란 이렇게 주변의 반응에 좌우되는 삶이라고 했다.
‘삶을 바로잡을 용기’의 저자 존 오트버그 목사는 성경의 중심 주제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달라스 윌라드 역시 성경의 주된 주제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 중심에는 예수가 계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할 것이니 외롭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결코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 8:2)
외로움을 성찰의 시간으로
우리가 관계 중독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영적인 고갈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회피하고, 사람들의 얕은 시선이나 SNS의 엄지척과 하트 속에 숨어 외롭지 않은 척, 힘들지 않은 척 위장한다. 하지만 물질이나 피상적인 관계가 내면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는 없다. 우리가 진정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영원한 삶을 약속하신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이 24시간 매초마다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갖는다면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세밀히 만져주시고 우리 삶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늘 지켜주신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번잡한 일상과 관계에서 벗어나 우리 내면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다. 그의 말씀을 듣고 음미하며 세속적인 삶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는 찰스 스펄전 목사는 “극지의 하늘에서 빛나는 별처럼 밝은 별은 없다. 사막 모래 한복판에서 솟아나는 물만큼 달콤한 물은 없다. 그리고 역경을 이겨낸 믿음만큼 귀한 믿음은 없다”고 했다. 시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상황에 처해 보지 않고서는 그 능력을 알 수 없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존 비비어는 저서 ‘광야에서’를 통해 “누군가 당신에 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하자. 변명을 하며 같은 헛소문으로 반격하는 대신 묵묵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오히려 그 사람을 축복하라. 그러면 당신은 70㎏의 시험을 들어 올린 것”이라고 했다. 다음 단계인 80㎏에 도전하고 이어진 역경들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훈련은 계속돼 85㎏에 이르고 마침내 하나님이 계획하신 더 큰 계획 또는 새로운 지위를 감당할 준비가 된 것이라고 했다.
평생을 문맹 퇴치 운동과 선교에 헌신한 프랭크 루박 선교사의 고백도 무한한 위로를 준다. “오늘은 하나님이 모든 것 뒤에 계시는 것 같다. 바로 내 손 밑에 계시고, 이 타자기 밑에 계시고, 이 책상 밑에 계시고, 이 파일 안에 계시고, 이 카메라 안에 계시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디에나 가까이 계신다는 느낌은 외로운 사람에게 무한한 아늑함과 편안함을 가져다준다.”(‘하나님의 임재 연습 플러스’ 중) 그러면서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했다.
성경 속 외로움
성경은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떠는 인간과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선지자 엘리야는 갈멜산의 영적 승리 후 이세벨의 위협 앞에서 낙심하여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다. “나만 홀로 남았거늘”(왕상 19:10) 그의 절규는 사명자의 고독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셔서 책망 대신 먹이시고, 세미한 소리로 만나 주셨다. 외로움의 절정은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날 수 있는 은밀한 기회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은 수많은 시편에서 버려짐과 고립의 고통을 노래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심지어 가장 가까운 아들에게 반역을 당했을 때, 그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고 고백한다. 가장 의지했던 이들에게서 버려졌을 때의 외로움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욥은 가족과 전 재산을 잃고 신뢰했던 친구들한테도 외면 당하고 비난을 받았다. 인간관계가 줄 수 있는 위로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사람에게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사람에게 버림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 특히 첫 번째 변론 때 아무도 자신을 돕지 않았다고 고백할 때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딤후 4:16)고 했다.
누구보다 가장 큰 외로움을 겪으신 이는 예수다. 겟세마네에서의 고립과 제자들의 배신을 넘어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단절되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외로움을 이기는 유일한 답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 23:4)고 고백했듯이 외로움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건져 올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없애려 하기보다 외로움을 통해 하나님께 더 다가가 영적 성장을 이루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