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안 교수의 질문하는 삶] 너희가 무엇을 찾고 있느냐

입력 2025-12-02 03:03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건넨 말씀은 선언이나 명령이 아닌 질문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요 1:38·새번역성경)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이 질문은 인간 존재의 심층을 흔드는 근원적 질문입니다. “너희의 욕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너희 마음의 중심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느냐.”

세상은 “무엇을 가져야 행복할까”라고 끊임없이 묻습니다. 성공과 돈, 명예와 인정, 영향력…. 겉보기에는 이 모든 게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에 관한 자연스러운 대답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소유하고 나면 다시 공허가 찾아옵니다. 마이클 J 바클리 예수회 신부는 ‘무엇을 찾는가’란 책에서 “예수의 물음은 단순한 욕망의 나열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여 사랑과 관계의 자리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의 장면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을 봤습니다.(38절)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전, 그분이 먼저 인간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심판보다는 초대를, 통제보다는 사랑을 주는 예수님의 시선 앞에서 제자들은 자기의 갈망을 비로소 자각합니다. 제자들은 묻습니다. “랍비여,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응답은 간결합니다. “와서 보아라.”(39절)

‘찾다’ ‘머물다’ ‘보다’ 이 세 단어는 요한복음 전체를 꿰뚫는 영적 흐름입니다. 찾음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머묾은 관계와 친교를 만들며, 봄은 계시의 완성에 이르게 합니다. 바클리는 말합니다. “예수의 질문은 제자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들어 올린다.” 인간의 욕망은 자신을 넘어설 때 비로소 충만해집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을까요. 적잖은 이들이 안정된 삶과 인정받는 자리, 성공적인 관계를 원한다고 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얻고도 여전히 마음이 공허한 이유는 이것들이 머물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변화 가운데 ‘거할 자리’와 ‘안식처’, ‘지속되는 관계’를 잃어버린 시대를 삽니다. 직장과 인간관계, 신앙마저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묻습니다. “나는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내가 거주해야 할 진정한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

“와서 보아라”란 예수님의 답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를 가리킵니다. 머묾의 자리는 공간이 아니라 그분 자신입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신앙의 성숙은 찾음에서 머묾으로, 불안한 욕망에서 충만한 관계로 옮겨가는 여정입니다.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요한복음은 ‘머물다’란 단어를 반복해 강조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머묾은 관계의 지속, 사랑의 인내, 신뢰의 표현입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바클리는 다시 말합니다. “찾는다는 건 아직 채워지지 않은 사랑의 형태이며, 머문다는 것은 사랑이 성숙해지는 과정이다.” 끝없는 추구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영원히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머무르면 불안은 평화로, 결핍은 충만으로 변합니다.

오늘의 교회와 사회가 잃어버린 것은 이 ‘머묾의 영성’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상처받고 빠르게 떠나며,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머물 때 자랍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와 기도, 공동체와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충만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의 안정과 신뢰, 사랑의 충만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란 예수님의 질문에 섣불리 답하기보다, 먼저 멈춰 서서 그분의 시선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는 물어야 합니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그때 들려옵니다. “와서 보아라.” 그분을 따라 걷고, 함께 식탁에 앉고, 그분과 함께 침묵 속에 머무는 가운데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평생 찾아 헤매던 ‘머물 곳’이라는 사실을.

한동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