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은 12·3 비상계엄 사태가 남긴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국민적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점을 가장 뼈아픈 대목으로 꼽는다. 국가안보, 공동체를 위한 헌신, 자유민주주의, 법치 존중 등 그동안 보수를 떠받쳐온 가치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당을 지켜온 내부 인사들 역시 고개를 젓는다. 계엄 자체도 문제지만 중요한 국면마다 구세주만을 기다려온 ‘용병 정치’ 같은 보수의 오랜 모순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진단이다.
전문가들은 12·3 계엄 이후 1년간 이어진 난맥상이 국민에게 ‘과연 보수정당에 권력을 맡겨도 되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던지게 만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재묵 한국외대 교수는 30일 “보수의 기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기득권층의 사회적 책임)다. 그런데 윤석열 전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해 국가를 위험에 빠뜨려 놓고도 어떤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오히려 재판에서 부하와 논쟁을 벌이며 책임을 벗을 궁리만 한다”면서 “대통령이 형법 논리로 책임을 비껴가더라도 지금 같은 모습으로는 정치적 사망선고가 내려질 것이고, 당에도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수영 정치평론가는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탄핵은 대통령과 측근의 일탈에 가까웠다면 윤 전 대통령은 제왕적 통치수단으로 계엄을 꺼내 들었다”며 “공동체를 위한 헌신, 자유와 책임 등 보수의 정신을 전면 부정했기 때문에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회 국방위원회에 오래 몸담았던 한 보좌진은 “채상병 사건으로 등 돌린 보수 인사가 적지 않았는데,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하는 장면까지 전 국민이 생중계로 목격했다”며 “‘안보는 보수’라고 외치면 이제 국민이 코웃음 치지 않겠느냐”고 자조했다.
‘용병 정치’는 국민의힘 다수가 공통으로 거론하는 고질병이다. 당에서 인재를 키우지 않고 국민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을 ‘떴다방’처럼 데려와 선거를 치르는 게 관행이 됐다. 지난 대선 ‘한덕수 추대론’ 이전에도 황교안 전 총리,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이 주요 실패 사례로 거론된다.
영남 지역의 다선 의원은 “윤 전 대통령이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였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며 “정치 경험이 없어서인지 이준석 대표를 축출하거나 유승민 전 의원을 주저앉히는 등 굉장히 무리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고 말했다. 용병 정치를 계파 갈등의 부산물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당내 특정인에게 권력이 쏠리는 것을 견제하는 동시에 당권 지분이 전혀 없는 사람을 간판으로 내세운 뒤 ‘킹메이커’로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려는 흑막이 많다는 의미다.
더불어민주당의 인재 육성을 배워야 한다는 반성도 있다. 이재명 대통령만 보더라도 민주당 부대변인으로부터 시작해 성남시장, 경기지사, 당대표 등으로 체급을 키웠다. 한 의원은 “민주당은 법안 발의 등 의정활동이나 방송 출연 횟수까지 세세하게 평가해 공천에 반영하는 반면 우리는 늘 낙하산 공천”이라며 “공천 주는 사람한테만 잘 보이면 끝인데 누가 열심히 하겠느냐”라고 말했다.
극단 지지층은 보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탄핵 국면 아스팔트 시위에서 세력화된 이들은 지난 8월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당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한 재선 의원은 “극단 유튜버나 윤어게인 세력에게 당이 포획당했다는 게 계엄 이후 가장 큰 상처”라며 “당이 점점 민심과 괴리돼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박동원 폴리컴 대표는 “국민의힘이 민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굉장히 떨어져 있다”며 “강성 지지층 이야기만 반복해서 듣고 민심이라 착각하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묵 교수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과의 지지율이 20% 포인트가량 차이 나도 ‘여조 결과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현실을 부정한다”며 “필터 버블에 갇혀버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국민의힘 내 ‘중도는 실체가 없다’는 식의 주장이 팽배한데 그야말로 실체가 없는 것”이라며 “2023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2024년 총선, 2025년 대선 참패에서 이미 검증이 됐다. 오기 부릴 일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정우진 이강민 이형민 기자 uz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