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구조조정의 칼날 위에 서 있지만 지난 수십년간 석유화학은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자 수출 효자 산업이었다. 석화 산업은 1970, 80년대 정부 주도의 진흥 정책과 기업들의 대대적인 설비 투자로 호황을 누렸고 2000년대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면서 폭발한 수요에 힘입어 또 한번 황금기를 맞았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일회용품 사용이 급증하고 재택근무로 전자제품 판매가 늘면서 뜻하지 않게 역대급 실적을 기록하는 운도 따랐다.
그러나 이건 착시였다. 일시적 수요가 사라지고 중국이 증설한 석화 설비들이 본격 가동되면서 공급과잉 시대가 열렸다. 친환경 규제로 석화 제품에 대한 일상적인 수요도 둔화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셰일가스에서 추출한 에탄으로 나프타보다 더 싸게 ‘산업의 쌀’ 에틸렌을 뽑아낼 수 있는 설비가 등장해 한국산 범용 제품은 가격경쟁력에서 점점 더 밀렸다. 그 결과가 현재 한국 석화 기업들이 직면한 위기의 실체다.
석화 업계 사람들은 코로나 시기의 특수한 일시적 호황이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든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때 벌어들인 돈으로 범용에서 벗어나 스페셜티(고부가가치 특수제품)로의 전환에 속도를 냈어야 하는데 실기했다는 뒤늦은 자책도 흘러나온다. 석화 업계의 구조조정은 시장 환경의 변화와 경쟁 심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쇠퇴하는 건 한순간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이와 반대로 전례 없는 투자와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인공지능(AI) 분야에선 ‘AI 거품론’이 불거졌다. 젠슨 황의 엔비디아를 필두로 한 AI 칩 제조사들이 기록적인 실적을 내고 있음에도 최근 글로벌 증시를 뒤흔든 AI 거품론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분위기다. AI 및 데이터센터에 투자한 비용은 천문학적인데 실질적 수익 창출은 기대만큼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의구심이 거품론에 불을 붙였다. ‘AI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앞으로 AI 시대가 활짝 열린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단 과잉투자로 인한 수익성 문제는 한 번쯤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AI 생태계 안에서 서로가 고객이자 투자자로 얽혀 있는 순환거래가 확산하고 있다는 점도 거품론의 한 징후로 지목된다. JP모건은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빅테크 기업들이 쏟아부은 막대한 AI 투자비용을 회수하고 이익을 내려면 매년 6500억 달러(약 956조원)의 추가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추산을 내놓기도 했다. 전 세계 15억명의 아이폰 사용자들이 매달 34.72달러를 더 내야 달성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한다.
글로벌 시장 장악을 위한 선점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초기 단계의 혁신 산업인 AI를 두고 거품을 이야기하는 건 성급한 감이 있다. 다만 석화 구조조정이 성숙기에 접어든 초과공급 산업의 내리막길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면 AI 거품론은 혁신기술에 기반한 투자 호황과 그로 인한 기대수익의 불균형이 너무 커지면 이 또한 조정기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 거품은 현실적인 수익 모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 터지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산업은 언젠가 그 업종에 맞는 방식으로 과열과 조정을 경험한다는 업계의 보편적 진리다.
서로 다른 업종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결국 어떠한 산업도 기술 변화와 경쟁 등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체감하게 한다. 구조적 한계에 부딪힌 성숙 단계의 산업이든 기대가 현실을 너무 앞서는 듯한 초기 단계의 산업이든 ‘영원한 호황’은 없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권지혜 산업1부 차장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