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청산작업에 화력집중… 정년·연금 등 현안은 후순위

입력 2025-12-01 02:04
국민일보DB

“내란 청산은 정치 보복이나 권력다툼,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정신이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난 9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은 비상계엄 이후 지난 1년간 이어져 온 현 여권의 인식을 압축해 보여준다. 민주당이 거대 야당에서 집권당으로 변모한 뒤에도 내란 청산은 0순위 과제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반면 정년연장과 연금개혁, 개헌과 같은 사회적 대토론과 숙의가 필요한 당면 현안은 후순위로 밀려났다. 강성 지지층 주도의 청산 작업에 몰두했던 민주당이 집권 여당의 책임감을 느끼고 국가 미래 설계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주당은 대선 이틀 뒤 본회의를 열어 3대 특검(내란·김건희·채상병 특검)법을 처리했고 내란 청산, 3대 개혁(검찰·사법·언론 개혁)을 간판 슬로건으로 내세운 새 당대표를 선출했다. 내란 청산은 정치적 구호를 넘어 고강도 입법으로 이어졌다. 불법 부당한 비상계엄의 재발을 막겠다며 처리한 계엄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9월 김민석 의원안을 시작으로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의원이 발의한 38건의 법안을 통합·조정한 해당 법안은 12·3 비상계엄 사태를 거치며 드러난 제도적 허점을 보완하는 데 초점을 뒀다. △계엄을 선포할 시 국무회의록을 즉시 작성, 국회에 제출하고 △계엄 선포 이후 국회의원과 국회 공무원의 국회 출입·회의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며 △계엄사령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군경과 정보·보안기관 직원의 경내 출입을 금하는 내용이 골자다. 해당 법안은 지난 7월 3일 본회의에서 재석 259인 중 255인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공무원의 법적 ‘상명하복’ 의무는 76년 만에 폐지를 앞두고 있다. 인사혁신처와 행정안전부가 지난 25일 입법예고한 국가공무원법·지방공무원법 개정안에 따르면 직무 수행 시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할 ‘복종의 의무’는 ‘지휘·감독에 따를 의무’ 등으로 바뀐다. 새 법이 시행되면 공무원은 구체적 직무 수행과 관련된 상관의 지휘·감독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위법 판단 시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의견 제시나 이행 거부를 이유로 불이익 처분을 해서도 안 된다. 군인이 상관의 위헌·위법한 명령에 불복할 수 있도록 하는 군인복무기본법 개정안 또한 국회에 여럿 계류 중이다.

민주당의 고강도 내란 청산 속도전은 제1야당 국민의힘의 반성 부재가 국민적 분노를 키운 영향도 있다. 지난 28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민주당의 정당 지지도는 42%, 국민의힘은 24%로 나타났다. 중도층에 국한하면 양당의 지지도는 45%와 15%로 더 벌어졌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양당 모두 ‘집토끼’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무당층이 특별히 늘어나지 않는 것은 결국 상대적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며 “민주당이 다 잘하고 있다기보다 국민의힘이 더 못한다고 보는 중도층이 많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어느덧 내란 재판 1심 선고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민주당 내에서도 집권당다운 면모를 더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검 수사와 정부 각 부처 차원의 자체 감찰·조사, 법원의 재판이 이미 궤도에 오른 상황에서 당까지 내란 청산에 매달려 있는 것은 사회에 보탬이 안 된다는 뜻이다. 내년 지방선거 또한 고려 요인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해 장기 징역형 이상의 유죄가 선고되면 내란 청산 프레임만으로 내년 지방선거를 치르기 쉽지 않을 것”(재선 의원) “‘집권야당’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당직자)는 주장이 나온다.

최근 국민의힘에서 계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기 시작한 점도 민주당의 기조 전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국민의힘이 중도층 확장에 나서면 민주당으로서도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어서다.

국정 동력이 충분한 정권 초반을 놓치면 손쓰기 어려운 대형 과제가 여럿 쌓여 있다. 정년연장, 산업재해와의 전쟁, 지속가능한 보건의료 체계로의 전환 등이 그렇다. 연금개혁도 빼놓을 수 없다. 구조개혁을 논의해야 할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지난 4월 발족했으나 5개월이 지난 9월 30일에야 민간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전체회의를 열었다. 늑장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여야는 최근 결국 연금특위 임기를 내년까지 연장하는 방안에 뜻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선거를 앞두고 논의에 얼마나 속도가 붙을지는 미지수다.

이재명정부 1호 국정과제이자 여권 내에서도 종종 ‘내란 종식의 완성’이라고 표현하는 개헌 또한 아직은 구호에 그친다. 개헌을 위해선 국민투표법이 먼저 개정돼야 하지만, 지난해 6월 김영배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안을 비롯해 22대 국회 들어 발의된 7건이 모두 기약 없이 계류 중이다. 참여연대는 지난 27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40여년간 축적된 사회 변화와 개혁의 요구는 이제 헌법 개정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며 “국회가 개헌특위를 구성해 개헌 논의에 착수하고, 11년째 위헌 상태로 방치된 국민투표법을 개정하며, 시민이 참여하는 개헌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 민주당 의원은 정치가 지나치게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잘못을 판단하는 건 외부 기관의 일이고, 정치의 진짜 역할은 앞으로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며 “정치는 과거가 아닌 현재·미래 시제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경모 한웅희 기자 ss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