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만㎞ 넘어선 해저통신케이블망
전 세계 자료 전송 95% 이상 담당
전력망, 에너지 시장 대륙 넘어 확장
해양 지배력 척도로 중요성 높아져
전 세계 자료 전송 95% 이상 담당
전력망, 에너지 시장 대륙 넘어 확장
해양 지배력 척도로 중요성 높아져
영국은 17세기 이후 거대한 상선대와 해군력을 바탕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의 무역로를 넓히며 산업혁명과 함께 세계 무역 흐름을 통제하는 절대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역시 19세기 말 스페인·미국 전쟁을 계기로 괌과 필리핀을 장악하고 태평양을 자국의 전략 무대로 편입하면서 영향력 확대의 주도권을 움켜쥐었다. 이는 영국 탐험가 워터 롤리의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통찰을 현실로 만든 대표적 사례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 인터넷 시대에도 이 통찰은 유효하다. 전 세계 정보의 대부분이 해저 통신케이블을 통해 이동하기 때문이다. 해저 케이블망을 구축하고 운용하는 국가와 기업이 정보 흐름과 디지털 경제의 속도를 사실상 결정한다. 실제로 미국은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IT 기업을 통해 세계 해저 통신케이블망의 절반 이상을 직간접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오늘날 방대한 해저 통신케이블망은 19세기 중반 대서양을 가로지른 전신 케이블에서 시작됐다. 1858년 영국과 미국을 처음 해저로 연결한 구리 전신 케이블은 비록 불안정했지만 대륙 간 전신 통신의 시대를 열었다. 1956년에 등장한 해저 동축 케이블(TAT-1)은 국제전화 서비스의 본격적 확장을 이끌었고, 1988년 도입된 광섬유 기술은 통신 용량을 비약적으로 확대했다. 인터넷의 확산과 함께 해저 광케이블은 글로벌 정보 전달의 핵심 기반시설로 자리 잡았다. 이제 해저 통신케이블망은 총연장 140만㎞를 넘어섰으며, 전 세계 자료(인터넷, 영상, 음성 등) 전송의 95% 이상을 담당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국제 인터넷 전송의 99% 이상을 해저 케이블에 의존하고 있다. 전화 통신, 인터넷 서비스, 클라우드 컴퓨팅, 금융 거래, 군사용 통신에 이르기까지 세계 경제 대부분의 활동이 해저 케이블의 자료 전송에 의존한다. 해저 케이블은 각국이 중시하는 전략적 자산으로 몸값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해저 케이블의 가치가 커질수록 그것은 디지털 경제의 근간을 넘어 국가 안보의 핵심 취약점으로도 인식된다. 특히 군사용 통신은 적국의 파괴나 은밀한 개입의 표적이 될 수 있으며, 그 위협은 케이블 절단부터 도청까지 물리적 형태로 나타난다. 냉전기의 사례는 이러한 위험을 잘 보여준다. 1971년 미국은 당시 소련의 오호츠크해 해저 통신케이블을 도청해 핵전력과 잠수함 운용 정보를 얻기 위해 해군, 중앙정보국, 국가안보국이 참여한 극비 작전 ‘아이비 벨’을 수행했다. 미국 해군은 특수 잠수함 USS 할리벗을 투입해 수심 120m 해저에서 케이블을 찾아내고, 통신 내용을 녹음하는 장치를 설치했다. 매달 테이프를 교체하며 소련 태평양 함대와 핵잠수함 기지 운영에 대한 군사 정보를 수집했다. 더 발전된 장비로 여러 지역에서 추가 도청이 진행됐지만 1980년 국가안보국 직원의 내부 배신으로 작전이 노출돼 소련이 도청 장치를 회수하면서 이 작전은 막을 내렸다.
해저 케이블 활용은 통신을 넘어 에너지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해저 전력케이블은 해저 통신케이블이 등장한 19세기 후반 송전 기술 발전과 함께 시작돼 주로 연안 연결을 통해 확장됐다. 오늘날에는 고전압직류(HVDC) 기술을 기반으로 수백에서 수천㎞를 잇는 장거리 연결이 가능하다. 기후변화 대응의 흐름 속에서 북유럽의 풍력 전력과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의 태양광 전력이 국경을 건너 실시간으로 거래되는 시대가 열렸으며, 호주는 세계 최장의 해저 전력케이블을 구축해 호주에서 생산된 대규모 태양광 전력을 싱가포르로 보내는 호주·아시아 전력망을 설치 중이다. 이러한 해저 전력케이블은 재생에너지 확산과 전력망 안정화의 핵심 시설이자 에너지 안보와 시장 통합을 좌우하는 전략적 자산이다. 이는 단순한 전력의 이동 통로를 넘어 국가의 산업 구조와 에너지 전환 속도를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전력의 비단길로 기능하며 해저 케이블 시대의 의미를 한층 넓힌다.
통신과 전력 분야를 넘어 해저 케이블은 최근 해양 관측 설비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유네스코 산하 정부간해양학위원회가 주도하는 전지구 해양관측시스템(GOOS)에서 새로운 관측망 요소로 인정한 스마트(SMART) 케이블은 해저 통신케이블의 증폭기에 지진, 압력 및 수온 센서를 장착해 해저에서 해양 상태 자료를 직접 수집하는 관측 기반 시설이다. 핵심은 이미 전 세계 바닷속을 연결한 통신케이블을 그대로 활용해 지진과 해양 정보를 실시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시스템은 심해의 미세한 온도나 압력 변화, 그리고 해저 단층의 진동을 감지해 즉시 공유함으로써 지진과 쓰나미 조기 경보, 지진 활동 위험 평가, 기후변화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마트케이블은 해저 통신망이 정보 전달 기능을 넘어 심해 환경 자체를 감지하는 관측 기반으로 기능하게 만들고, 바닷속 디지털 기반 시설의 전략적 가치를 한층 확장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구축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돼 초기 단계인 현재는 특정 국가 재원보다 인텔 공동 창업자, 구글 전 회장이 출연한 민간 자선단체들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해저 케이블은 통신, 전력, 과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핵심 기반시설로 자리 잡으며 전략적 중요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해양 패권은 이제 군사력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바닷속을 흐르는 정보의 길을 누가 만들고 지키는가가 국가 경쟁력의 새로운 기준으로 더해지고 있다. 최근 연구와 보도는 해저 케이블의 건설·관리·보호 역량이 새로운 형태의 해양 지배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해양 패권 경쟁은 더 이상 수면 위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해저에 깔린 가느다란 선 하나가 세계 질서의 흐름을 바꾸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재학 한국해양한림원 석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