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슬로 먼저 주목한 작은 출판사… “저의 몽상가적 기질 덕분”

입력 2025-12-01 02:15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알마출판사 사무실에서 안지미 대표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 탱고’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 대표는 라슬로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큰 기쁨이자 행운이었다”면서 “축제 같은 시간은 잠시 머물다 떠나갔고 이제 현실만 남았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아무래도 알마출판사와 안지미 대표,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떼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지난 10월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호명됐을 때, 국내 번역 작품이 모두 한 출판사에서 출간됐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것도 대형 출판사가 아닌 대표를 포함해 직원 4명에 불과한 작은 출판사, 알마였다. 상업성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작가의 작품을 한 권이 아니라 여섯 권이나 내놓을 수 있는 뚝심이 내내 궁금했다.

최근 서울 마포구 알마출판사 사무실에서 마주한 안 대표는 자신이 “몽상가적 기질이 있다”고 했다. 국어사전은 ‘몽상가’를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상념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때로는 ‘실현성이 없는 헛된 꿈’을 찾는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있다. 모두가 관심이 없던 라슬로를 발견하고 한국에 내놓은 것도 안 대표의 ‘몽상가적 기질’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예술의 향기가 넘치던 어린 시절

몽상가적 기질의 연원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 대표의 집은 늘 예술의 향기가 넘쳤다.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했는데 꽤 오랫동안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빈소년합창단이나 파리나무십자가소년합창단 공연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고 했다.

안 대표는 딸 다섯 집안의 늦둥이였다. 큰언니와 열네 살이나 차이가 났다. 네 언니는 늘 어린 동생을 공연장으로 데리고 다녔다. 언니들의 안 대표가 예술적으로 ‘독립’한 것은 1985년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바로 집 앞에서 산울림소극장이 개관한 해였다. 집 근처를 산책하다 자석에 이끌리듯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처음 본 작품이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당시 연극 그 자체에 대한 기억보다는 연극이 끝난 후 객석과 무대를 감싼 공기가 너무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공기에서 향기가 난다고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마법 같은 시간이었던 같아요.”

안 대표는 늘 예술과 함께였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던 그해 에리히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을 읽고 프랑스 파리를 동경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늘 산책하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친구들에게 “이어폰과 한몸 같다”는 말을 듣곤 했다. 안 대표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구체적인 꿈이나 목표가 있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한때는 대기업 취직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최종 면접에서 꿈을 묻는 말에 그는 “언제나 자유로운 상태에 놓이고 싶다”고 답했다. 면접관들의 선택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저한테는 몽상가적 기질이 있고 그 기질은 문학과 연극 등 예술을 동경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종이와 종이 위에 새겨지는 활자가 좋았다

안 대표는 똑같은 행동을 매일매일 반복하는 걸 잘 못 하고 별로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그가 다양한 예술 가운데 미술, 그 가운데 시각디자인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안 대표에게 음악을 전공시키려고 했다. 음악은 반복된 연습이 필수였지만 미술을 그렇지 않았다. 그는 “회화를 선택했으면 아마 힘들었을 것”이라며 “디자인은 기본 도구를 가지고 생각한 것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 대표는 ‘개선문’을 읽고 꿈에 그렸던 프랑스 파리의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는 “종이와 종이 위에 새겨지는 활자를 무척 좋아했다”면서 “특히 손끝에 닿는 종이의 촉감과 특유의 냄새가 좋았다”고 말했다.

애초 음반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는 LP에서 CD로 넘어가던 시기라 활동 공간이 없었다. 파리에서 귀국 후 잠시 백수 생활을 할 때인 95년, 운명처럼 한국의 1호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정디자인’을 만났다. 정디자인에서 북디자이너로서 경력을 쌓아 갔지만 음악에 대한 허기를 채울 수는 없었다. 마침 당시는 홍대 근처를 주 무대로 인디음악 문화가 활발해지던 시기였다. 그는 언더그라운드 음악문화 잡지 ‘팬진공’의 창간부터 폐간까지 3년 넘게 잡지 디자인을 맡았고, 인디밴드들의 음반 디자인 작업도 함께했다. 정디자인에 적을 뒀기 때문에 ‘팬진공’ 작업은 퇴근 후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는 “무보수로 작업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24시간 각성된 상태로 지내면서도 마냥 신이 났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노벨 문학상이란

정디자인을 나온 안 대표는 프리랜서 북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여러 출판사와 함께 일했다. 가장 많이 작업했던 곳이 2006년 문을 연 신생 출판사 알마였다. 건강상의 이유로 출판사를 운영할 수 없게 된 고(故) 정혜인 대표의 권유로 2015년 알마 대표가 된다. 그는 “원래 구체적인 목표나 계획이 없다 보니 겁이 없었다”면서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만드는 과정이 즐거운 책을 만들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과정이 즐거우면 결과가 좋지 않더라고 크게 좌절하거나 꺾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행운처럼 좋은 결실을 볼 때는 그 기쁨이 훨씬 더 크고 오래 갑니다. 그런 벅찬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어려운 시간을 견딜 힘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요.”

안 대표는 알마의 대표가 된 뒤 인문 교양서 위주에서 연극이나 영화, 문학에 집중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라슬로의 작품들이다. 안 대표는 라슬로의 대표작 ‘사탄 탱고’를 2018년 출간한 데 이어 ‘저항의 멜랑콜리’ ‘라스트 울프’ ‘서왕모의 강림’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등을 잇달아 내놨다. 일곱 번째 소설 ‘헤르쉬트 07769’도 준비 중이다. 보통 안 대표는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출간하려고 한다. 그는 “한 작가가 문학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 대표에게 라슬로와 노벨문학상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살면서 이런 행운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큰 행운이었다”면서 “큰 기쁨이자 행운”이라고 말했다. “라슬로 작가님은 전화 인터뷰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고 나의 일상은 여전하며 지금 전입신고를 하러 갈 것’이라고 말하던데, 저는 오히려 일상이 축제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축제 같은 일상은 아주 잠시 머물다가 떠나갔지만 말이죠.”

그에게 남은 것은 현실이다. 안 대표는 “라슬로 작가님의 책 중에는 계약 기간이 임박한 책들도 있는데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과는 조건이 다를 것 같다는 실질적인 걱정도 많다”고 했다.

책을 만든다는 것은

안 대표가 최근 가장 관심 두는 분야는 희곡이다. 2019년 영국 극작가 닉 페인의 ‘별무리’를 출간한 이후 꾸준히 희곡 작품을 출간하고 있다. 그는 “특히 내년에는 더 많은 희곡이 나올 것 같다”고 귀띔했다. 그동안 출판한 책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을 골라 달라는 부탁에 망설임 없이 포르투갈 극작가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희곡 ‘소르푸’와 ‘바이하트’를 꼽았다. “평생 잊지 못할, 죽는 순간에도 기억하고 싶다”는 두 작품 모두 안 대표가 직접 연극을 관람한 후 출간으로 이어졌다. 그는 “무대 위에서 배우들에 의해 발화된 활자를 종이 위에 새기는 작업을 하면서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가장 아쉬웠던 책은 무엇일까. 그는 “어떤 책을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면서 “중심이 흔들리면서 ‘이 책은 좀 잘 팔릴까’ 하는 얄팍하고 조급한 마음에 낸 책들이었다”면서 “그런 책들에는 지금도 미안하고, 결과 역시 좋지 않았다”고 했다.

안 대표는 책을 만든다는 것을 “세상에게 말을 거는 일, 그리고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과 같다”고 비유하며 “앞으로도 알마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좋은 책’이란 “마음을 흔들고 울림을 주는” 책이다. 출판 불황 시대에 출판사들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크다. 역시나 안 대표는 큰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다. “출판은 언제나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이었고 더 악화할 것이 남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계속 변하고 고여 있는 물은 돼서는 안 되겠지만 그 변화에 언제나 발 빠르게 맹목적으로 쫓아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류와 함께 영원히 존재할 것 같기도 합니다. 알마의 생존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한 권 한 권 즐겁게 쌓아가고 싶습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