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선생님은 연기 본보기, 큰 우산이었다”

입력 2025-11-28 01:09
국민배우 이순재의 발인식이 27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120여 명의 후배 배우들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됐다. 사진공동취재단

“거짓말이었으면,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케이 컷’ 소리에 툭툭 털고 일어나셔서 ‘다들 수고했다, 오늘 정말 좋았어’라고 해주실 것만 같습니다.”

27일 오전 국민배우 이순재의 영결식에서 배우 김영철이 슬픔에 잠긴 채 추도사를 읽자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김영철은 고인의 동양방송 시절 직속 후배이자 드라마 KBS ‘공주의 남자’에서 호흡을 맞춘 각별한 사이다. 그는 “선생님은 힘들어 보이는 후배에게 먼저 다가가 등을 토닥여주는 분이었다. 생전에 보여주신 열정과 따뜻함은 앞으로 우리에게 길잡이가 될 것”이라며 추모했다.

이날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족과 고인의 동료·후배·제자 등 1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과 발인이 엄수됐다.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비롯해 정동환, 유동근, 최수종, 정준호, 전혜진, 정준하, 정일우, 임수정 등 많은 배우가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생전 고인이 애정을 쏟아 지도했던 가천대 연기예술과 학생들도 스승을 떠나보내는 자리를 지켰다.

MBC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을 함께한 배우 정보석의 사회로 영결식이 시작됐다. 정보석은 “선생님은 연극·영화·방송 전반에서 늘 본보기가 돼주신 분”이라며 “항상 제일 앞에서 큰 우산으로 후배들이 마음 놓고 연기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다”고 애도했다.

추도사를 위해 마이크 앞에 선 배우 하지원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떼지 못했다. MBC 드라마 ‘더킹 투하츠’에서 호흡을 맞췄고, 평소 ‘팬클럽 회장’을 자처할 만큼 고인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깊었던 그는 “이 자리에서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원은 생전 고인에게 ‘연기는 왜 하면 할수록 어려운지’ 물었다가 “인마, 지금도 나도 어렵다”는 답을 들었던 일화를 돌이켰다. 그는 “그 말은 제게 큰 위로이자 평생 간직할 가르침이었다”며 “선생님은 연기 앞에서 누구보다 겸손했고 스스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현장에서 약 7분간 고인이 출연했던 다양한 작품과 무대 위 모습들이 담긴 추모 영상이 상영되자 조문객들 사이에서 흐느낌이 이어졌다. 영결식이 끝난 뒤 운구가 시작되자 조문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운구 행렬은 장지인 경기도 이천으로 곧장 향했다. 당초 연극인협회장, 국민배우장 등 여러 장례 절차가 논의됐지만 평소 고인의 뜻에 따라 별도의 노제 없이 검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지난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끝으로 무대를 떠난 고인은 노환 등으로 병원 치료를 받다 지난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그는 60년 넘게 연극과 방송을 오가며 한국 대중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서울 중랑갑에 당선돼 활동했으나 이내 연기 무대로 돌아갔다.

평생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허준’ 등 수많은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트콤 ‘하이킥’ 시리즈와 예능 ‘꽃보다 할배’를 통해서는 한층 친숙한 모습으로 사랑받았다. 연극 무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87세에 연극 ‘리어왕’에 출연하고 지난해까지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김승연 기자 ki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