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버블의 역사… 거품론이 거품이었다

입력 2025-11-28 00:50

철도·전기·자동차·인터넷… 신기술마다 거품론 일었지만
버블이 터진 자리에 기술은 남아 우리 삶과 세상을 바꿔 왔다

AI 거품론에 생각해야 할 질문은 ‘버블 이후 누가 살아남느냐’
후발주자에 기회일 거품의 시간 어떻게 보내느냐에 미래 달렸다

1830년 영국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세계 최초로 도시와 도시를 잇는 철도가 놓였다. 시간표에 맞춰 승객을 나르는 새로운 비즈니스가 성공을 거두자 각지에 철도를 깔겠다는 회사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철도 건설 계획서를 흔들며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를 모은 벤처기업이 260개가 넘었다고 한다. “철도에 투자하면 귀족처럼 살 수 있다”는 신문 광고가 실리면서 산업혁명이 낳은 신흥 중산층이 앞다퉈 뛰어들었다.

주가가 10배는 우습게 폭등해 ‘레일웨이 매니아’라 일컫던 열풍은 거품 논쟁을 불렀다. 더 타임스의 1845년 사설은 철도를 “일종의 광기”라 규정했고, “수요보다 욕망이 노선도를 그렸다”는 철도 과잉론이 비등했다. 장밋빛 청사진이 하나둘 실패해 파산이 속출하며 결국 거품이 터졌는데, 마차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버블이 꺼진 자리에 이미 1만㎞ 넘는 철도가 깔려 있었고, 이는 전국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 산업혁명을 완성하는 인프라가 됐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처럼 욕망이 향하는 곳에 늘 거품이 있었지만, 세상에 없던 기술이 열광을 누리다 회의와 비관의 시선을 부른 테크 버블은 철도가 처음이었지 싶다. 산업혁명 이래 기술은 진보를 거듭했고, 그럴 때마다 거품론은 반작용처럼 따라다녔다.

1879년 에디슨의 백열전구에 놀란 미국에선 수천 개 전기회사가 난립했다. 투자가 몰릴수록 전깃줄이 뒤엉켜 빈발하는 화재와 비싼 요금에 “거리의 위험한 사치품”이란 논란이 이어졌는데, 직류의 짧은 송전 거리를 테슬라의 교류 전기로 극복하며 몇몇 회사로 재편돼 결국 전기의 시대를 열었다. 1920년대 미국에만 1800개나 됐던 자동차 회사는 “다 사라질 것”(월스트리트저널)이란 거품론의 예상대로 됐지만, 포드의 대량 생산이 성공하며 그 기술은 인류의 이동 방식을 바꿔놓았다. 전기 버블이 잦아든 자리에 램프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고, 자동차 버블이 터진 도로를 다시 말이 달리는 일은 없었다.

이후에도 1920년대 200배 주가 폭등을 기록한 라디오 버블, 1950년대 “계량기가 필요 없는 에너지”라던 원자력 버블, 1980년대 IBM 컴퓨터가 부른 PC 버블과 유전자 기술이 낳은 생명공학 버블이 있었다. 닷컴 버블을 거쳐 메타버스, 암호화폐, NFT(대체 불가 토큰) 버블까지 산업혁명 이후 테크 거품론은 대충 꼽아도 열 손가락이 부족하다.

이중 진짜 거품을 굳이 들라면 TV에 자리를 내준 라디오와 최근의 메타버스·NFT 정도일 텐데, 라디오는 여전히 애용되고 가상공간과 블록체인도 계속 연구 중이니, 거품이 꺼진 뒤 혁신적 기술이 사라진 사례는 사실상 없는 셈이다. 항상 기대가 먼저 폭발해 거품이 일고 터지지만, 언제나 기술은 그 자리에 남아 예고한 변화를 이끌었다. 거품은 기술을 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장할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했다.

지금 인공지능(AI) 거품론도 그렇다. 이미 일상을 바꾸면서, 철도·전기·자동차·인터넷의 궤적을 밟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거품의 시간이 지난 뒤 누가 살아남느냐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버블의 역사에서 거품을 견디고 세상을 바꾼 기업의 몇 가지 특징을 알 수 있다. 그들은 ①기술의 본질에 충실했고(전기 조명으로 밤을 재정의한 제너럴 일렉트릭) ②실제 시장에서 현금 흐름을 창출했으며(전자상거래 수익모델을 구축한 아마존) ③인프라를 장악했고(검색 플랫폼을 완성한 구글) ④사람들의 습관을 바꿨다(스마트폰을 일상의 중심에 가져온 애플).

이런 특징에 부합하는 AI 거품 이후의 승자를 짚어보라 했더니, 챗GPT는 엔비디아(인프라), 아마존(클라우드), 구글(검색+생태계), 마이크로소프트(업무 행태 변화)를 각각의 강점과 함께 꼽았다. 그런데, 정작 AI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자 자기 주인인 오픈AI를 빼놓았다. 이유를 묻자 냉정하게도 항목별 점수를 제시한다. ‘기술적 충실도 A+, 행동 변화 영향력 A+, 매출 구조 B-, 현금 흐름 C, 인프라 장악도 C’.

챗GPT에 세계가 놀란 지 꼭 3년이 됐다. 제미나이3의 약진이 말해주듯, 짧은 시간에도 판도는 크게 바뀌었다. 기술과 시장의 흐름을 정리하는 거품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후발주자에겐 기회가 된다. “모델 크기에 집착 말고, 제조 AI, 물류 AI, 금융 AI 등 응용과 생태계에 집중하면 한국 기업에 승산이 있다.” AI답게 건조한 말투로 챗GPT는 이렇게 말했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