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모든 김 부장에게 보내는 찬사

입력 2025-11-28 00:32

최근 기업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소재가 있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다. 김 부장이 다니던 회사는 통신사지만, 현실에선 업종과 관계없이 다들 비슷한 처지라고 입을 모은다. 정말 내 얘기 같아 못 보겠다는 이들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매회 챙겨 본다는 이들도 있다. 하필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 시점이 주요 기업 인사철과 겹쳐 현실과 똑 닮은 장면이 드라마에서 재현되고 있다며 씁쓸해하는 이들도 있다.

대기업 부장 A씨는 2년 전 동기가 상무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부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동기 중 처음으로 임원을 단 만큼 ‘아직은 아니지만 곧 내게도 기회가 올 것’이란 희망 섞인 기대도 했다. 그렇게 2년이 흘렀지만 임원 승진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최근 인사 발령에서 상무로 승진했던 동기가 3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A씨는 “2년 전엔 참 부러운 소식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승진보다 안정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며 “후배들이 나보다 더 잘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민망하지만 자존심을 내세우다간 지금 자리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아 조용히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부장 B씨는 승진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20년 가까이 부장 직함을 유지하는 동안 그를 스쳐간 임원은 족히 10명이 넘는다. 부장으로 정년을 채우는 게 ‘위너’라는 주변의 위로는 씁쓸하지만, 내심 맞는 말이라며 위안 삼는다. 부장으로 일하는 동안 B씨는 자녀들을 대학에 진학시키며 안정적으로 가정생활을 꾸렸다. 승진을 포기하자 회사 생활도 편안해졌다. 인사철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한다는 마음으로 여러 해를 보냈다. 예측할 수 있는 삶이 가져오는 안정감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엔 퇴직 후 인생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서울에 자가가 있고, 대기업에 다니는 김 부장 정도면 성공한 삶이다. 1억원 넘는 연봉을 받으며 5억원의 퇴직금을 받은 김 부장이 상가 분양 사기에 휘말렸어도 여전히 그는 평균보다 잘사는 축에 속한다. 그런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주변의 김 부장들을 보면 숫자로 대변되지 않는 어떤 애잔함이 있다.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서서 파리한 얼굴들과 함께 끼여 가는 출근길, 매일 마주하지만 자리를 옮기면 곧 남이 될지 모르는 회사 동료들, 퇴근 후에도 이어지는 술자리에 밤이 깊어서야 겨우 몸을 누이는 비루한 몸뚱이. 주 5일을 꾸역꾸역 살아내면서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게 지나간 시간들. 달력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접어든 장년의 삶. ‘대기업에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다 있는데 가만 보니 내가 없네’라는 드라마 속 문구는 수많은 김 부장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연말 인사철에 짐을 싸거나, 자리를 지켰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들은 곳곳에 있을 터다. 승진에 물먹고 자리를 지키지도 못한 이들은 패잔병처럼 쓸쓸하게 회사를 나설 것이다. 어제만 해도 그대로였던 자리가 누가 있었냐는 듯싶게 비어 있는 광경이 여기저기서 목격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회사를 떠나는 것이 곧 패배를 뜻하는 건 아니다. 긴 세월의 회사 생활이 부정당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빈자리를 채우고, 누군가는 빈자리를 그리워하겠지만 책상 너머의 삶은 새로 시작된다. 떠나는 김 부장의 뒷모습에 쓸쓸함보다는 당당함이 깃들기를 바란다. 이제는 김 부장이 아닌 김낙수로 다시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이제 진짜 김낙수를 찾을 때다. 김 부장이었던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심희정 산업1부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