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구분은 스스로를 지키는
본능적 행동… 위치 조정하며
유연함 갖는 균형감 필요해
본능적 행동… 위치 조정하며
유연함 갖는 균형감 필요해
선을 긋는다는 것은 묘하게 멋진 일이다. 세상사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 방향을 잃기 쉽고, 어느 순간엔가 원하지 않던 자리로 떠밀려 가곤 한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종종 삶의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선을 잘 긋고, 맺고 끊기를 깔끔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어린 시절, 놀이의 세계에는 대개 선이 있었다. 골목이나 운동장에 그어진 금은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가장 단순한 장치였다. 금을 밟으면 ‘죽는’ 규칙 하나로 순식간에 질서가 생기고, 편이 갈리며, 그 안에서 묘한 소속감도 생겨났다.
인간은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세계를 범주화한다. 이는 자기 보호 본능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자 판단의 효율성을 높이는 장치다. 단순한 구분은 ‘우리’에 대한 안정감을 주고, ‘그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다.
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경계, 종교적 구분, 국경과 신분, 언어와 계급. 수많은 선이 사람들을 나눴고, 어떤 선은 삶의 조건을 결정지었다. 제국의 국경, 식민과 독립의 경계, 냉전의 분단선은 개인의 운명을 좌우했다. 다행히 극단의 시대가 지나가고 피아의 구분이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줄어들었지만, 선을 긋는 일은 여전히 사회의 구조와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스포츠 역시 선의 세계다. 최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연승을 이어가는 안세영 선수 경기를 보며 배드민턴의 규칙을 하나둘 더 알게 되었다. 셔틀콕이 선 위에 떨어지면 인, 선 밖이면 아웃. 선수는 심판의 판단에 의문이 들면 챌린지를 요청한다. 디지털 판정은 거의 오차 없이 인·아웃을 정확하고 엄밀하게 가린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모든 판정을 카메라에 맡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인간 심판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스포츠는 그 불완전함을 제도에 품는다. 아마 경기의 생동감이 바로 그 틈, 곧 인간이 판단하고 망설이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더 강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챌린지의 제한도 그 긴장을 더욱 극대화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보증하는 시스템이라면 셔틀콕 하나에 담긴 심리전과 드라마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승부가 갈린 뒤 두 선수가 예의를 담아 인사하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승패가 전부인 경쟁에서조차 경계를 지키는 방식은 품격이 있다. 스포츠가 오락을 넘어 삶의 은유가 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선을 긋지만, 이 선은 대부분 머릿속에서 만든 관념의 구조물이다. 불확실한 현실을 단순화하고 통제하기 위해 설정한 임시적 구획이다. 그러나 실제 세계의 경계는 선명한 금이 아니라 스펙트럼에 가깝다. 흑과 백이 아니라 무수하게 다른 농도의 회색이 이어지는 흐릿한 지대이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선 긋기’가 아니라 ‘선 지키기’다. 관념 속의 명징한 선에 집착하기보다 현실의 경계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조정하고 균형을 유지하며 유연하게 대응하는 일. 이 실천이야말로 실제로 할 수 있는 분별의 기술일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합의한 규칙을 존중하며 그 틀 안에서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조율하고 방향을 잡아가는 일이다.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하고, 때로는 모든 ‘챌린지 기회’를 소진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다음 랠리를 이어가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이다.
삶은 정교한 라인 판독 장치도, 무한한 챌린지 기회도 허락하지 않는다. 적절한 선을 지키려는 노력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그 방향성만은 우리를 더 나은 자리로 이끈다. 어린 시절에는 금을 밟으면 곧바로 ‘죽는’ 단순한 놀이가 있었지만, 실제 세계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야박하다. 그럼에도 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태도는 그 야박한 세계를 견디게 한다. 그래서 아마 옛사람들은 마음이 고요하고 바르면 세상의 경계가 스스로 드러난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허영란
울산대 교수
역사문화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