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생에 후회는 없어요. 시작할 때부터 각오했던 거니까. 주변 사람들이 고생했지, 나는 조금의 불행도 느끼지 않았어요.”(2018년 인터뷰)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면 좋겠어요. 예술가라서 좋은 점은 자유롭다는 거거든.”(2019년 인터뷰)
70년 가까이 연기 외길을 걸어온 천생 배우 고(故) 이순재는 생전 이런 고백을 들려줬다.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연기를 향한 그의 애정과 열정은 이토록 뜨거웠다. 큰 기둥 같던 그를 떠나보내며 연예계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후배 배우들은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며 저마다 애도를 전했다.
26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빈소에는 전날에 이어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배우 출신인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날 빈소를 찾아 “후배들에게 연기하는 자세부터 우리 말을 똑바로 해야 한다는 원칙적 조언까지 끊임없이 해주시던 분”이라며 “무대와 드라마에서 함께하고 싶었는데 떠나시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배우 이미숙은 “연기자들에게 엄청나게 큰 기둥이셨다”고 추모했고, 박정수는 “장난기 많으셨던 목소리를 떠올리니 벌써 그립다”고 했다. 방송인 유재석과 함께 빈소를 찾은 조세호는 “항상 인자한 미소로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모습이 기억난다”며 “그곳에서는 좋아하는 연기 마음껏 하시며 편안한 시간 보내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TBC 공채 시절부터 55년간 수많은 드라마 작품을 함께한 배우 장용은 전날 빈소에서 “때로는 아버지 같고, 때로는 형님 같았다. ‘무대에서 쓰러지는 게 행복하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귀감이 되는 멘토이자 로망 같은 존재, 대단한 어른이셨다”고 회상했다. 연극에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손숙은 “말년에 연극 무대에서 나와 부부로 많이 나왔다”며 “순재 오라버니, 곧 만나요. 그곳에서도 또 함께 연극해요”라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tvN 여행 예능 ‘꽃보다 할배’를 함께한 박근형, 백일섭, 신구, 이서진과 나영석 PD도 조문했다. 백일섭은 “왜 얘기도 없이 빨리 가나. 우리끼리 ‘95살까지만 연기합시다, 그때까지 나도 같이 살 테니까’라고 말했는데 약속도 못 지키고 갔다”며 애통해했다. 신구는 “연예계에 더 오래 계셔야 할 분인데, 안타깝고 슬프다”고 했다. 박근형은 “그는 항상 리더였고, 평생 부지런하게 사셨다”며 “형님, (이제)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시고 편안히 쉬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호흡을 맞춘 정보석, 최다니엘, 서신애 등도 빈소를 찾았다. 아역 시절 손녀 역할을 맡아 ‘빵꾸똥꾸’로 불리며 사랑을 받았던 진지희는 성인이 된 뒤 연극 ‘갈매기’에서 다시 고인과 무대에 섰다. 그는 “연기에 대한 진지함, 무대 위에서의 책임감, 삶의 태도까지 곁에서 보고 배울 수 있어 감사했다”고 말했다. 황정음도 “따뜻한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변치 않는 사랑과 기억을 남겨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손자 역할을 맡았던 정일우는 “배우로 첫걸음을 내딛던 순간을 선생님과 함께해 영광이었다”며 “사랑합니다. 할아버지”라고 작별을 고했다.
SNS를 통한 추모도 이어졌다.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재학 당시 고인에게 연기를 배운 유연석은 “10년의 무명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적어도 10년은 묵묵히 해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며 감사를 전했다. 연극 ‘리어왕’을 함께한 아나운서 출신 배우 오정연은 “무대 위에서 마주하던 깊은 눈빛, 무대 뒤에서 건네주시던 따뜻한 조언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고인을 그리워했다.
이 밖에도 고두심, 강부자, 김영옥, 김용건, 최수종, 하희라, 최지우, 김희애, 장동건, 이성민, 정준호 등 많은 배우들이 빈소를 방문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도 후배들이 함께한다. 27일 발인 전 열리는 영결식은 배우 정보석이 사회를 맡고, 김영철과 하지원이 추모사를 낭독한다. 수의는 평소 친분이 깊던 한복 디자이너 박술녀가 준비했다. 고인은 발인 후 경기도 이천 에덴낙원에서 영면한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