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북녘에 복음을” 러 파견 노동자 통해 성경 8만권 들여보낸다

입력 2025-11-27 03:01
북한에 전해지는 성경은 만화와 수첩, 검은색 표지 등 다양한 형태로 출판·제작되고 있다. 모퉁이돌선교회 제공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이후 남북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통일선교 단체들이 제3국을 우회하는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스위스·오스트리아에 거점을 둔 A선교회가 최근 북·러 밀착 기류에 맞춰 러시아어 학습 교재 등으로 만든 성경 8만권을 제작해 시베리아 경로를 통해 북한 보급에 나선 것으로 26일 확인됐다.

국민일보가 단독 입수한 A선교회 프로젝트 문건에 따르면, 이들은 총 8만부 규모의 대북용 성경 제작에 착수했다. 러시아어-북한어 대조방식으로 제작되는데, 누가복음·사도행전 등 쪽복음 2만권, 창세기·출애굽기 2만권, 신약전서 1만권, 어린이 그림 성경 2만권과 달력 등으로 만들어진다.

수첩 형태의 성경 내부 모습. A선교회 제공

제작되는 성경은 겉모습만 보면 업무용 수첩이나 어학 교재와 구별하기 힘들다. 성경은 왼쪽 페이지에 러시아어, 오른쪽 페이지에 북한식 조선어를 나란히 인쇄해 ‘러시아어 교재’로서의 기능도 한다. 프로젝트 관계자는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에게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며 “이 책은 보위부의 검열 과정에서 성경이 아닌 유용한 학습 도구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소지 명분이 된다. 기독교인이 대다수인 러시아인들이 보는 성경이라는 것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주축 멤버들은 과거 구소련 치하에서 공산당의 감시를 피해 지하교회 신앙을 지키다가 체제 붕괴 후 자유를 찾은 ‘구소련권 디아스포라’들이다. 프로젝트 총괄 H대표는 국민일보가 입수한 인터뷰 영상에서 “14살 때 서방에서 비밀리에 반입된 작은 성경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며 “과거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누군가 목숨을 걸고 성경을 보내줬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가 그 복음의 빚을 제2의 소련과 같은 북한에 갚을 차례”라고 덧붙였다.

A선교회 H대표가 구소련 시절 서방으로부터 비밀리에 받았던 소형 성경과 유사한 형태의 성경을 들어보이는 모습. A선교회 제공

배달 경로는 한국을 거치지 않는 ‘제3의 루트’다. 러시아 인접국에서 인쇄해 완성된 서적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트럭 등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 등 북·러 접경 지역으로 집결된다. 이곳에 모인 8만여권의 성경은 러시아 파견 북한 노동자들에게 우선 전달될 예정이다.

프로젝트는 궤도에 올랐지만,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협력이 절실한 상황이다. A선교회에 따르면 이번 프로젝트의 총예산 약 35만 달러(약 5억1200만원) 중 대부분은 유럽 교회들의 후원으로 마련됐다. 인쇄 및 운송을 마무리하기 위한 15만 달러(약 2억2000만원) 가량의 재정이 부족한 상태다.

인적 지원도 시급하다. 이들은 종이 성경 외에도 스마트폰 사용이 가능한 북한 엘리트층을 겨냥해 ‘조선어 오디오 성경 애플리케이션’을 개발 중이다. A선교회 관계자는 “기존 러시아어 성경 앱에 조선어 텍스트와 오디오를 탑재해야 하는데, 러시아어와 조선어에 모두 능통하면서 IT 기술을 갖춘 전문 인력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프로젝트가 대북 선교의 현실적인 돌파구라고 본다. 지난 40년간 북한 성경 10만여권을 보내며 이 같은 사역을 감당한 모퉁이돌선교회는 최근 선교의 대상을 ‘북한 지역’에서 ‘북한 사람’으로 확대했다. 모퉁이돌선교회 관계자는 “국경 봉쇄로 북한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 막힌 상황에서, 중국 러시아 중동 등 해외에 체류 중인 북한 노동자와 유학생들에게 직접 성경을 전달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0여년 전 북한군 장교가 해외에서 우연히 우리가 보낸 성경을 읽고 회심해 지금은 함께 일하는 사역자가 됐다”며 “1999년 약 9만명 수준이던 북한 지하교회 성도는 2020년 기준 20만~25만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고 전했다.

모퉁이돌선교회 역시 다가오는 성탄절을 맞아 성경 5만권 중 5000권을 먼저 배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이 관계자는 “북한 주민 대다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성경 표지조차 보지 못한다”며 “김일성 일가 주체사상에서 금기하는 성경을 볼 기회를 갖는 것은 복음 전파를 넘어 억압된 영혼에 자유를 선물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