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케이프타운에서 보는 새 세계와 한국의 역할

입력 2025-11-27 00:32

아프리카 시대 스스로 선언한 남아공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미·중과 러시아 불참했지만 자유무역 정상화 촉구 의미 커
이 대통령 제시한 연대 어젠다 우리가 세계 잇는 역할 맡아야

11월의 케이프타운은 마치 시간을 멈춘 도시 같다. 강한 햇빛이 짙푸른 바다 위에서 점점이 부서지고, 청명한 하늘 아래 향기롭고 서늘한 공기는 조용한데, 테이블 마운틴의 능선을 타고 흐르는 바람은 마음의 속도를 낮춘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케이프타운 컨버세이션 2025’ 국제회의에 참석 중이다. 세계가 다시 방향을 찾으려 애쓰는 복잡한 시기지만 회의장 안에는 새로운 질서를 그리려는 진지한 에너지가 감돈다.

며칠 전 이곳에서 1400㎞ 떨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렸다. 미국의 보이콧과 중국·러시아 정상의 불참으로 분위기는 무거운 듯했지만 합의는 도출됐고 메시지는 분명했다. 개발도상국 부채, 기후적응, 디지털 격차 완화, 아프리카 산업화 등 아프리카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의제들이 논의의 중심에 올라섰다. 인구와 시장, 핵심광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동성 등 미래를 좌우할 요소를 품고 있는 대륙이 스스로 아프리카의 시대를 선언한 순간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방문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이 대통령은 개발도상국의 부채 부담 문제를 언급하며 부채 지속가능성(debt sustainability) 확보를 위한 국제적 협력을 강조했다. 또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인프라 투자, 재난대응 복원력 강화, 식량안보를 위한 국제연대 등 공동의 글로벌 어젠다를 제시했다.

무엇보다 그는 예측 가능한 무역 및 투자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세계무역기구(WTO) 기능 회복과 자유무역 질서의 정상화를 촉구했다. 보호무역주의와 지정학적 경쟁으로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규칙 기반의 무역질서 복원”을 언급한 것은 케이프타운 회의의 문제의식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이번 회의에서 특히 논쟁이 뜨거웠던 주제는 녹색분리(green decoupling)였다. 기후목표 달성을 위해 탄소집약적 공급망을 분리하려는 국가들의 움직임이 남방 국가들의 산업화 전략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그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가 주요 화두였다. 나는 발표에서 한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첫째, 탄소배출을 줄이면서도 산업화를 가능하게 하는 ‘녹색 제조 파트너십’ 구축. 둘째, 재생에너지, 전력망, 스마트그리드에 대한 공동투자를 통해 남방 국가의 전력 병목을 해소하는 인프라 전략. 셋째, 디지털 전환과 농업 및 보건 등 사회 인프라의 효율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디지털 공공재 협력 모델이었다. 이들은 녹색 전환과 성장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실질적 전략이다.

회의장에서 만난 아프리카와 글로벌 남방 전문가들은 이번 G20에서 한국이 보여준 메시지 변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디지털 전환, 전력 인프라, 농업 현대화, 산업 현지화는 단순한 개발협력이 아니라 미래 세계경제의 구조를 재편할 핵심 의제다.

그들은 한국이 기술, 제조, 그리고 디지털 역량을 기반으로 새로운 협력 모델을 어떻게 구체화할지에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이 대통령이 강조한 자유무역 질서의 회복과 예측가능성 확보는 남방 국가들에도 중요한 문제였기에, 한국이 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점은 고무적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케이프타운 컨버세이션의 올해 의제 또한 이런 흐름과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갈등의 시대에 다자주의를 지키고, 상거래의 불확실성 속에서 규칙 기반 무역질서를 복원하며, 연결성을 기술 및 디지털 협력으로 새롭게 구축하는 일, 이 세 가지는 모두 중견국 한국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세계가 더 불안정해질수록 한국의 역할은 오히려 분명해진다. 이미 변화된 자세를 보인 만큼 이제 한국이 제시해야 할 것은 방향이 아니라 실행의 방식이다.

케이프타운의 저녁노을은 유난히 길고 깊다. 붉은빛이 바위산과 짙푸른 바다, 그리고 아름다운 도시로 천천히 스며드는 풍경을 바라보면 그동안 논의된 메시지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갈등과 단절의 시대를 넘어 다시 세계를 잇는 길, 그 길에서 한국이 어떤 역할을 수행할지는 결국 우리의 실행의지에 달려 있다. 지금 이 붉은빛의 경계처럼 우리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문턱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문턱을 어떻게 넘어설지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대화하면서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김흥종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선임연구위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