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줄 세워 비교하고 평가합니다. 최근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수험생을 성적에 따라 분류하여 등급을 정합니다. 시험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면 학생들 사이에 “너 몇 등급이야”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오고 갑니다. 능력의 수치화에 익숙해진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느새 사람의 존재 가치마저 등급을 나누는 듯합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디매오가 살던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이었고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길가에 앉은 거지’였다고 말합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장애와 가난은 죄의 결과로 생긴 천형처럼 여겨졌고, 이런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쉽게 배제되는 존재였습니다. 바디매오라는 이름조차 ‘불결함(디메오)’을 뜻하는 어원을 갖고 있어, 그는 평생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회적 낙인을 지닌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담대히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의 외침에는 한 가지 확신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했지만 예수님만큼은 그러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규정하던 말과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가치, 새로운 존재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일련의 무리가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는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로마 군병도, 대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했던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약해 보이는 바디매오에게 “잠잠하라”고 말하면서 그의 길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상처받은 이들이 또 다른 약자를 밀어내는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더욱 크게 외친 그의 절박함을 들으신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부르라.” 사람들이 밀어낸 존재를 예수님은 가장 먼저 부르십니다. 그의 가치가 쓸모에서 오지 않고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사람을 등급과 성과로 나눕니다. 점수를 기준으로 가능성을 판단하고 스펙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매기려 합니다. 또 경제적 수준과 소유에 따라 계층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도 그런 기준으로 우리 인간을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를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성과나 결과가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나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수능 문제지 필적확인란에는 아름다운 문구가 인쇄되고 있습니다. 2019학년도 수능 문제지 필적확인란에는 이런 문장이 인쇄돼 있었습니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김남조 시인의 ‘편지’ 한 구절입니다.
숫자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수험생들에게 이 한 문장은 세상의 평가와 비교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조용한 위로를 주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바라보신 시선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세상이 어떤 말로 우리를 평가하고 규정하든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고재국 이문동교회 부목사
◇고재국 목사는 이문동교회에서 부목사로 성도를 섬기며 동시에 피해자 국선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