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업계가 VIP 등급 기준을 조정하며 혜택을 고도화하고 있다. 경기 침체에도 억 단위 결제를 이어가는 상위 소비층이 백화점 실적을 좌우하는 흐름이 날로 뚜렷해지면서다. 백화점은 프리미엄 채널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며 최상위 소비층을 붙잡기 위한 경쟁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25일 백화점업계에 따르면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은 최근 VIP 선정 기준을 조정했다. 롯데백화점은 내년부터 최고 등급 ‘에비뉴엘 블랙’을 777명으로 제한하고 ‘에메랄드’ 기준을 연간 실적 1억원에서 1억2000만원으로 상향한다. 8000만원 이상 등급도 신설해 기준을 세분화했다. 현대백화점은 내년 ‘자스민 블랙’(1억5000만원 이상) 위에 최상위 등급을 추가한다. 신세계백화점은 올해부터 ‘블랙 다이아몬드’(1억2000만원 이상) 등급을 운영하며 최상위 소비층을 공략하고 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는 상황에도 소비 여력에 끄떡없는 VIP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롯데백화점의 VIP 매출 비중은 2020년 35%에서 지난해 45%로 증가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VIP 매출 비중이 올해 처음 절반(52%)을 넘어서며 지난 7일 개점 이후 최단기간에 매출 3조원을 돌파했다.
백화점들은 VIP를 대상으로 ‘경험의 질’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만 가능한 경험’이 상위 소비층의 충성도를 결정 짓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신세계백화점은 VIP 전용 큐레이션 플랫폼 ‘더 쇼케이스’를 론칭해 증류소 투어·프라이빗 클래스가 결합된 한정판 위스키, 프랑스 테니스 대회 ‘롤랑가로스’ 패키지 등을 선보였고 모두 완판됐다. 올해(1~10월) 이용객의 평균 객단가는 약 2000만원으로 명품 카테고리의 7배 수준에 달했다.
롯데백화점도 디지털 카탈로그 ‘손수:지음’을 통해 국내 미출시 브랜드와 독점 상품을 큐레이션하고, 주요 점포 라운지를 디자인 스튜디오와 협업해 재단장하며 VIP 공간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마카오 ‘샌즈 차이나’, 일본 ‘한큐백화점’,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등과 제휴를 맺어 해외에서도 VIP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VIP 전용몰 ‘RSVP’에선 아트·와이너리·아이비리그 투어 등 테마형 여행 상품이 완판을 이어갔다.
등급이 세분되고 혜택이 커지면서 결제 실적을 사고파는 중고거래까지 횡행하고 있다. 중고거래 플랫폼에선 “○○백화점 실적 팝니다·삽니다” 게시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통상 실적 인정 금액의 3~4% 수준에 거래되는데 집계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연말엔 더 높은 금액에 거래되기도 한다. 주차·라운지·기타 혜택 등이 등급에 따라 세밀하게 나뉘면서 “조금만 더 쓰면 한 단계 올라간다”는 심리가 소비를 자극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공식적으로 이를 금지하고 백화점마다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지만 완전한 단속은 쉽지 않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엔 VIP 행사 등 혜택을 조용히 운영하는 분위기였지만 최근에는 적극적으로 알리는 추세”라며 “물가 상승 등의 변화에 맞춰 등급 기준을 조정하고 경험을 정교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주은 기자 ju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