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몸이 두 개라면

입력 2025-11-26 00:34

너무 바빠 분신까지 바라는
마음이지만… 내 삶의 무게
짊어질 사람 결국 나뿐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공부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다시 학생이 되니, 과제와 시험과 발표에 치인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한가롭게 일을 안 할 순 없다. 설명하자면 구차하지만, 가정이 있는 몸인지라 적어도 내 몫 정도의 일은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늘 시간에 쫓긴다. 지금 이 글도 지하철에서 짬을 내 쓰고 있다. 양쪽으로 거구의 사내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틈에 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쓴다. 그야말로 일상의 서커스를 벌이는 셈이다. 이 모든 것이 시간이 없어 생기는 일이니, 절규하듯 외친다. ‘아. 내 몸이 두 개라면!’(물론 속으로만. 나는 지하철에서 이동 중인 소심한 시민 아닌가.)

그런데 정말 몸이 두 개가 된다면 어떨까. 일단 내 분신이 맡아줬으면 하는 일은 라디오 방송과 강연이다. 한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으니, 분신과 내가 마주치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분신이 땀 흘리며 강연하는 장소에 내가 태연하게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볼까’ 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쪽쪽 빨면서 객석에 앉아 있는 건 곤란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대혼란이 빚어질 것이다. 물론 “저 실은 쌍둥이예요!”라고 둘러댈 수 있지만 진실은 늘 시간의 편 아닌가. 결국 분신의 정체가 들통날 것이다.

그러면 행사비와 강연비가 반으로 줄지 모른다. “최민석씨는 어차피 일을 두 배로 할 수 있으니, 반만 받아도 되잖아요!” 이런 논리라면 원고료도 금세 반 토막이 난다. 지금도 습자지처럼 얇은 내 원고료가 반값이 된다니, 어질어질하다.

이런 연유로 분신이 외부활동을 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 요즘은 SNS로 세상만사가 중계되는 시대이니 운이 나쁘면 최민석 1호는 서울, 최민석 2호는 런던에 있다 해도 들킬 수 있다.

이리 따져보면 분신의 존재로 덕을 볼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집에서 밀린 빨래나 걸레질하거나, 은둔형 작가처럼 두문불출한 채 집필만 진탕 해낼 때뿐이다.

게다가 아이러니도 있다. 칩거한 채 혼을 갈아 소설을 쓴다면, 어쩌면 그 작품은 대성공을 거둘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굳이 외부행사 같은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게 된다. 당연히 분신의 필요성도 사라진다.

누군가는 반론할 수 있다. ‘아니! 그 시나리오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바로 비주류 작가인 당신이 아니오. 그러니 어차피 성공 못하는 것 아니요?’ 이 지적에는 공감성이 떨어지는 나조차 격하게 동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상상에 의한 것이니 그냥 성공했다 치자. 아무튼 이 경우에도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방에 들어앉아 소설만 쓰면 몸에 이끼가 낄 만큼 좀이 쑤신다.

그러니 바람도 쐴 겸 오히려 나가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어진다. 즉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집에서 글을 쓸 분신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어이쿠!

정리를 해보자. 내 경우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분신이 생겨봐야 누릴 수 있는 혜택은 고작 요일을 정해 일을 밖에서 할지 집에서 할지 조정하는 것 정도다.

게다가 분신이 외부 일정을 소화할 때 나는 집에만 답답하게 갇혀 있어야 하니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그리고 분신 덕분에 내가 온전히 글을 쓸 수 있다면, 결국은 일을 하고 있으니 분신이 없는 것과 사실상 별 차이가 없다.

달리 말하자면 내 삶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결국은 나 자신뿐이다. 쓸쓸할지 모르겠지만 내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일은 나 자신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어찌 보면 현명한 삶이란 스스로 짊어질 수 있는 분주함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해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지하철과 버스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이 글을 쓰는 나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감당할 수 있는 분주함의 무게를 잘 짊어지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최민석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