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호 목사의 햇볕 한 줌] 신군비증강 시대의 대림절

입력 2025-11-26 03:23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통해 경제의 불확실성이 상당히 걷혔다. 한국 민주주의 회복력을 세계에 내보이고 K컬처의 매력을 확인한 것은 온 국민의 기쁨이었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가 가능하게 됐다는 소식에도 대다수 국민이 환영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가 사실상 용인되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K방산의 성장과 수출 확대가 국가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는 국민 가슴에 훈훈한 소식으로 와닿기도 한다.

그러나 시야를 세계로 확대해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은 급속히 재무장에 나섰고, 독일은 전후 최대 규모의 국방비 증액을 단행했다. 일본 역시 반격 능력을 명분으로 자위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미·중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중·일 갈등의 파고는 높아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국방부를 전쟁부로 명칭을 바꿨다. 세계는 급속히 첨예한 군비 경쟁의 회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는 인류 역사에서 국방비 비중이 유례없이 낮았던 시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이후 냉전이 다가왔지만 각국의 끈질긴 군비축소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내었다. 동구 공산주의권의 붕괴 이후 평화가 찾아 왔다. 그 평화의 품에는 풍성한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학자들은 ‘평화의 배당금’이라고 부른다. 평화가 정착되면 국가가 국민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혜택이 커진다는 말이다. 세계가 부러워하던 유럽 복지국가 모델도 군비 축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기가 아니라 의료와 교육, 돌봄과 연금에 더 많은 재원이 투입될 수 있었기에 시민의 삶은 안정됐다. 경제적 안정이 정치적 안정의 기반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 바구니가 비어가고 있고, 민주주의의 토대도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다. 배고픈 아이들을 먹일 양식이 총알을 만드는 데 쓰이고 학교와 병원을 지어야 할 재원이 미사일에 투자되고 있다. 핵추진 잠수함은 또 무엇을 내놓으라 할 것인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성경의 비전과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려 보라 한다. 그가 살던 시대는 야만적인 폭력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를 꿈꾸기 힘들 때였다. 그런데도 그는 폭력적 현실의 지평 너머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신앙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 갈망 가운데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신군비증강의 시대, 평화의 왕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기도해야 하나. 국방력 강화 요구를 전면적으로 외면할 수는 없다. 무책임한 평화주의는 답이 되기 힘들다. 그러나 피해서는 안 될 질문은 우리가 안전해지고자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며 무기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무기들이 세계를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1950년대에 존 허츠는 ‘안보 딜레마’라는 말로 현실을 요약했다. 국가들이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려 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공포를 키운다는 것이다. 안전을 위해 군비를 증강해 가는 흐름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는 역설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악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안한 사람들에 의해서일 것이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이 불안을 섬뜩하리만치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장 강력한 무기와 첨단 감시 시스템으로 무장한 미 백악관과 국방부, 군 수뇌부에 이 불안과 무력감이 가장 짙다는 역설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는 다이너마이트로 지은 집에 살고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몰라 두려워하며 점점 더 강력한 폭약을 장착하고 있다. 밥까지 굶어가며 아낀 돈으로.

군비증강은 온 사회의 자원을 집중해야 하는 정치적 과정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의 불안도를 높이고 미움의 에너지를 강화하는 정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우리 마음은 얼마나 거칠어질 것이며 사회 갈등은 또 얼마나 심각해질 것인가. 우리의 마음에도 폭발 직전의 다이너마이트가 쌓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눈에는 길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기다린다. 이제 곧 기다림의 절기, 대림절을 맞는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작은 촛불 하나 밝히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되뇌어보자.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주께서 우리에게 평화의 길을 보여 주시기를. 우리가 함께 순종하며 그 길을 따를 수 있기를.

(포항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