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여름, 서울 미술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그해 1월 문을 닫은 한 화랑을 살리자는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명동화랑 재기의 몸부림/ 집세 밀려 소장품마저 압수…간판 내려/ 화단 일각서 ‘돕기 운동’ 활발히”
그해 6월 10일자 경향신문에 나온 기사의 제목만 봐도 짠해지는 주인공은 갤러리 운영으로 집 두 채를 날리고 빈털터리가 됐다는 명동화랑 창업주 김문호(1930∼1982)다. 도대체 어떤 좋은 일을 했기에 화가와 조각가들이 발 벗고 나서 다시 갤러리를 열어달라며 기금 마련 전시회까지 가졌을까.
1970년 12월 명동성당 건너편 건설회관 2층에 문을 연 명동화랑은 개관 초부터 화제였다. 75평 면적에 전등만 100개가 넘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그해 4월 인사동에 반도화랑 직원 출신의 박명자씨가 문을 연 현대화랑(현 갤러리현대)이 12평짜리였으니까 화가들이 놀랄만했다. 현대화랑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본격적인 국내 첫 상업 갤러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김문호의 명동화랑은 잦은 이사와 함께 점점 규모가 작아졌고, 마침내 그가 세상을 떠나며 1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명동화랑을 기억하는 것은 그 전위성 때문이다. 서울옥션 이호재 회장은 23일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의 동양화, 도상봉의 유화 정물화가 잘 팔리던 시절에 전위적인 작품만 취급했다”며 “현대미술을 하는 화랑의 시조는 김문호의 명동화랑”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명동화랑은 장사를 못한 게 아니라 안 될 작가를 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김문호는 만 40세에 화랑업이 “유망해보여” 뛰어들었다고 한다. 부친의 석유회사에서 근무하다 명화 복제화 수출업을 시작하며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됐다. 한국은 1970년 무렵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가 나며 경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전후 처음으로 미술 시장이 형성되던 때였다. 하지만 작품이 팔려도 대중적 미감의 동양화와 구상 회화 중심이었다. 박명자의 현대화랑이 ‘김기창 도상봉 장우성 같은 주요 작가 전시로 완판에 가까운 실적”(경향신문 1971년 4월 8일)을 낸 것이 그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김문호는 대중적 취향이 아니었다. 71년에 가진 두 번째 기획전 ‘회화 오늘의 한국전: 30대의 얼굴들’이 그 신호였다. 회화도 조각도 아닌 새로운 미술 실험을 하던 AG(아방가르드의 이니셜), ST(스페이스 &타임의 영어 이니셜), 오리진 등 여러 미술그룹에서 활동하던 당시 30대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생존 작가 중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이우환의 한국 첫 개인전을 열어준 곳도 명동화랑이었다. 지금은 한국 미술계의 간판 장르가 된 단색화(단색 계열의 추상화) 대표 작가 박서보, 윤형근, 김창열, 하종현의 개인전이 열렸다. 단색화가 첫 뿌리를 내린 거점이 명동화랑이었다.
단색화뿐 아니었다. 단색화 뒤를 이은 실험미술 대가 이강소는 개인전을, 성능경, 이건용 등은 그룹전에 참여했다. 이강소는 김문호 대표가 개인전에 초대하며 “마음대로 하라”는 말에 고무돼 화랑에 선술집을 차리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당시는 이벤트로 불림)를 했다.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에게 전속작가처럼 작품 제작을 후원하고 1971년 개인전을 열어준 곳도 명동화랑이었다.
단색화 작가들과 실험미술 작가들은 지금 원로가 돼 미술계 거장이 됐지만 당시는 30대의 신진 작가에 지나지 않았다. 전시를 해도 작품이 팔리지 않는 추상화나 개념미술 장르의 작가들이었다. 1973년 대규모 기획전 ‘한국현대미술 1957-72, 추상=상황/조형과 반조형’은 1957년을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삼아 15년간의 흐름을 정리한 것인데, 국립현대미술관이 1978년에 가서야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전을 개최한 것보다 5년 앞섰다. 비평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1974년 ‘현대미술’ 잡지를 창간했다. 야심과는 달리 재정난으로 창간호만 내고 폐간됐지만 말이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화랑’을 운영하며 수시로 서울 화랑가를 오갔던 신옥진씨는 “당시는 명동화랑에서 전시를 열어준다고 하면 단색화 청년 작가들이 신도 안 신고 달려올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김문호가 미술시장 형성 초기인 1970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희한한 사람이 나타난 거”라고 표현했다.
김문호는 “단순히 중개자가 아니라, 미술사에 남을 훌륭한 작품을 그 현장에서 증인으로 지켜보는 창조적 화상”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화가들이 나아갈 길을 터주고 대중에게 제시하는 화상”을 꿈꿨다. 그래서 전문가의 안목을 빌릴 줄도 알았다. 홍익대 교수인 미술평론가 유준상, 이일 등과 교유하며 이들에게 기획과 평론을 의뢰했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출신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는 젊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이 오가며 왁자지껄했던 그 시절 명동화랑을 “마치 화상 컨바일러와 피카소 및 큐비즘 화가들이 벌였던 20세기 초두의 전설적인 화상과 화가들의 시절을 방불케 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돈 앞에 장사는 없다. 점점 재정이 엉망이 되면서 그는 1년이 멀다하고 갤러리를 옮겨야 했다. 처음 명동에서 충무로로, 다시 안국동으로 이사한 72년 8월부터 75년 1월까지 안국동 시절이 명동화랑의 전성기였다. 그 안국동의 명동화랑이 간판을 내리게 되면서 당대 작가들이 팔을 걷고 나섰고, 덕분에 76년 2월 관훈동에 재개관 기념전까지 열 수 있게 됐다.
“화상이 망했을 때 화가들이 도와주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고마운 일이다. 미술계 발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
이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한번 더 관훈동의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관훈미술관 사장이 내준 자투리 공간에 더부살이하다시피 했다. 마지막에는 갤러리 월급 사장으로 지내다 암 투병 끝에 50대 초반에 세상을 등졌다.
명동화랑도, 김문호도 단명했지만 미술계는 그를 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명동화랑을 조명하는 전시 ‘응답하라! 명동화랑’이 서울 서초구 신생 갤러리 스페이스21에서 열리고 있다. 김문호와 활발히 교유하며 명동화랑전시에 평문을 자주 써준 미술평론가 이일의 딸 이유진씨가 대표로 있는 화랑이다. 전시에는 이우환, 박서보, 윤형근, 이건용, 김구림, 성능경 등 당시 명동화랑에서 연 개인전과 그룹전 등에 참여한 13명 작가들의 작품을 일부 선별해 선보이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홍익대 정연심 교수는 “작가들이 예술정책을 통해 지원되는 오늘날과 달리, 1970년대에는 이런 제도적 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작가들의 개인적인 고군분투와 서울의 명동화랑과 같은 전시공간의 역할이 지대했다”며 “명동화랑의 실험성과 전위성을 되새기며 한국 미술에서 소거된 내러티브를 되살려 보는 것이 전시 취지”라고 밝혔다.
같은 해 문을 연 뒤 여전히 살아남아 창립 55년째를 맞는 현대화랑 창업자 박명자 회장은 “김문호 대표는 꿈이 크셨는데 (대중보다) 너무 앞서 갔다. 10년, 20년 앞서 갔다”고 기억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가 살아남지 못했지만 그 그늘 아래 있었던 이들이 지금 명동화랑을 불러내고 있다. 그 전시에 초대한다. 12월 27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