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키자니아. 어린이들이 각종 직업을 체험해볼 수 있는 테마파크다. 지난 21일 이곳에서 만난 전사랑(4)양의 꿈은 30분마다 바뀌었다. 마요네즈 통을 주물럭거린 뒤엔 “커서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했고, 물대포를 쏘고 나선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사랑이는 이날 또래 아이들과 뛰놀며 8개의 직업을 체험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사랑이의 걸음걸이는 또래와 조금 달랐다. 허벅지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까치발로 걷고, 5분쯤 뛴 뒤엔 “다리가 아프다”며 주저앉았다. 사랑이는 만 2세 때 듀센근이영양증(DMD) 진단을 받았다.
“오늘이 가장 강한 날”
듀센근이영양증은 유전자 이상으로 근육이 서서히 퇴행하는 질환이다. 일반적으로 10세 전후 보행 능력을 잃어 휠체어를 타야 하고, 20대엔 호흡기 근육 장애로 자가 호흡이 힘들어진다. 대부분 30대에 사망하는 희소유전질환으로 주로 남아에게 발병하지만, 5000만명 중 1명꼴로 매우 드물게 여아에게도 나타난다. 사랑이가 그 극히 드문 사례다.
사랑이 아빠인 전요셉(34) 목사는 “사랑이는 오늘이 가장 강한 날”이라고 말했다. 사랑이는 현재 일주일에 세 번 재활치료를 받으며 매일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고 있다. 약 부작용으로 키는 또래보다 작고, 골다공증이 진행 중이다. 새벽이면 근육 경련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일도 잦다. 전 목사는 “치료제 임상 데이터에 따르면 치료의 골든타임은 이제 18개월 정도 남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전했다.
치료제는 미국에서 가장 빨리 구할 수 있다. 가격은 약 46억원. 전 목사는 딸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지난해 11월 부산 기장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740㎞를 걸었다. 칠레에서 듀센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는 한 아이의 엄마가 국토대장정을 통해 후원금으로 치료비 53억원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접한 게 동기였다. 이미 무릎 수술을 네 차례 받은 몸이었으나 아빠는 주저하지 않았다.
740㎞를 걸은 아빠
전 목사는 “22일간의 국토대장정 동안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돌보신 것처럼 날 일으켜 세워주셨다”고 말했다. 물이 떨어질 땐 생수병을 건네주는 이, 사과를 나눠주는 농부, SNS로 응원을 전하는 이들까지. 딸을 위한 대장정을 응원해주며 십시일반 후원의 손길을 모은 교회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완주 시점 13억7000만원이 모였고, 이를 포함해 지금까지 25억원이 넘는 후원금이 사랑의열매로 전해졌다.
지난해 국토대장정을 마친 전 목사는 곧바로 치료를 위해 미국행을 준비했다. 미국 신학교에 지원해 합격도 해놨다. 한데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인터뷰가 걸림돌이 됐다. “현재 담임하고 있는 교회 성도가 몇 명이냐”는 영사의 질문에 전 목사는 사실 그대로 25명이라고 답했다. 영사는 바로 고개를 내리더니 여권을 돌려주며 최종 거절을 통보했다.
전 목사 가정은 올해 초 캐나다로 건너가 6개월간 머물며 미국 비자를 재신청했으나 또 거절됐다. 전 목사는 “제가 해볼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 같다”면서도 “우리 가정을 위해 최선의 길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했다.
희망은 남아 있다. 전 목사는 2023년 말부터 미국 UCLA 듀센센터 창립자인 스탠리 넬슨 박사와 이메일을 주고받고 있다. 넬슨 박사는 아들이 3세에 듀센근이영양증을 받은 뒤 전문적으로 이 병을 연구 중인 의사다. 사랑이와 증세가 거의 같았던 아이를 치료한 경험도 있다.
비자 문제로 당장 미국에 갈 순 없지만, 2세대 치료제를 비롯한 희소식도 있다. 전 목사는 “기존 치료제 부작용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신약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임상 중인데, 이르면 내후년 초 허가될 것 같다”며 “사랑이의 골든타임이 끝나기 전 아직 희망이 남아 있어 감사하다”고 했다. 전 목사 가족은 미국 비자를 다시 신청하기 위해 다음 달 20일 캐나다로 출국한다.
사랑이가 가르쳐준 것
전 목사는 사랑이를 통해 비로소 진짜 목사가 된 것 같다고 고백했다. 사랑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계획과 뜻을 하나님께 제안하는 식으로 살았는데, 이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딸 하나 제 뜻대로 고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으며 많은 게 달라진 것 같다”며 “이젠 모든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먼저 묻게 됐다”고 말했다.
사랑이를 키우며 성도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전 목사는 “사랑이를 바라보면 내 근육과 간, 쓸개 다 줘도 모자랄 것 같은 마음이 든다”며 “자녀를 통해 ‘누군가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의미를 깨달았다”고 언급했다.
성도들을 향한 사랑도 이젠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전 목사는 “사랑이가 근육병 진단을 받던 날, 아내가 울면서 ‘우리 사랑이 한 명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데,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얼마나 애타셨을까’라고 말했다”며 “사랑이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글·사진=이현성 기자 sag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