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관세 협상 타결로 ‘2000억 달러 대미 투자 청구서’가 날아온 뒤, 정부 일각에서 연간 2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를 놓고 여러 말들이 나온다. 정부는 우선 국민 부담을 의식해 국채 발행은 자제하겠다는 방침을 굳힌 듯하다. 그러자 외환보유액을 운용하는 한국은행으로 슬그머니 시선이 향하는 분위기다.
다만 한은이 연간 200억 달러를 벌어들일 만큼 공격적 투자 체질인지는 의문이다. 외환보유액이 4000억 달러가 넘는데도 한은은 AA급 우량채권 중심의 초보수적 형태를 보인다. 타국 중앙은행들은 금 매입을 늘리며 외환보유액의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은은 2011~2013년 90t을 샀다가 국제 금값 폭락으로 11억 달러(1조2000억 원)의 평가손실을 겪은 뒤, 금값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운 지금까지도 추가 매입을 10년 넘게 멈춘 상태다. 과거의 손실이 현재의 의사결정까지 움켜쥐고 있는 셈이다.
최근엔 이런 한은에 짐이 더해지는 모양새다. 기획재정부 한은 국민연금 보건복지부로 구성된 4자 협의체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을 동원한 환율 안정 논의가 주목적이지만 대미 투자가 고환율을 부추기는 상황에서 외환보유액 운용 전략이 이 테이블에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고 적극적 투자와는 담을 쌓아 온 한은의 변신이 불가피한 이유이기도 하다. 외환보유액의 88%를 우량 국채·회사채에 묶어둔 현재 구조로는 초대형 투자 재원을 만들어내기 어려워 결국 한은에 “조용한 채권쟁이에서 글로벌 펀드매니저로 변신하라”는 압력이 가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환보유액은 어디까지나 국가 경제의 최후 방패다. 방패를 칼처럼 휘두르려 하면 막아야 할 순간에 금이 갈 수도 있다. 금값 폭락의 상흔이 여전한 한은에 공격적 운용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전략 수정이 아니라 체질 자체를 흔드는 일이다. 금 트라우마로 투자에 누구보다 신중한 한은이 대담함과 원칙 사이에서 어떤 외환 포트폴리오를 마련할지 자못 궁금하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