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면 수치스러운 내용까지 남에게 보여줘야 하는 공직자들
사생활과 신체·금융 정보까지 개인사 고스란히 담긴 스마트폰
내란 동조 의심된다 이유만으로 영장도 없이 뒤져도 되는가
사생활과 신체·금융 정보까지 개인사 고스란히 담긴 스마트폰
내란 동조 의심된다 이유만으로 영장도 없이 뒤져도 되는가
“뒷덜미가 서늘해지면 한강으로 가라. 미련 두지 말고 휴대전화를 꺼내 강물에 던져라.”
꽤 오래 전 허물없이 지내던 취재원에게 들은 말이다. 공직사회에서 유행하는 말이라고 했다. 언제 감사·수사 대상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공무원이니 승진해 직위가 높아질수록, 신임을 얻어 핵심 보직에 접근할수록 실감나는 말이라고도 했다. 말만 그랬지 그 친구가 실제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난 출세에 목매지 않아. 지금 대단한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강에 다녀왔냐고 물어보면 늘 같은 대답이었다. 사실 휴대전화를 버리기란 쉽지 않다. 그냥 버릴만큼 싸지도 않다. 개인정보를 옮기지 않았다가는 최소한 한달을 나사 빠진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지금 나의 휴대전화 안에는 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전화번호 목록부터 가관이다. 한번 입력하면 좀처럼 삭제하지 않아 기억에서 사라진 이름까지 빼곡하다. 다시 만났을 때 실수할까 싶어 만난 날짜, 장소, 간단한 프로필과 메모를 넣었더니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버겁다. 카카오톡은 더 심하다. 속내를 털어놓은 은밀한 대화가 남아있고, 단체 채팅방에는 사회생활과 인간관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갤러리에는 10년이 훌쩍 지난 사진과 단톡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내려받은 동영상이, 문서함에는 어디서 받았는지도 모를 PDF 파일이, 오디오함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의 통화 녹음까지 있다. 휴대전화 바꿀 때마다 개인정보를 통째로 옮긴 지 10년이 넘었으니 수십년 정리 안한 창고와 다를 게 없다.
그게 다가 아니다. 캘린더에는 몇년치 약속과 일정이 쌓여있다. 탑재된 월렛으로 모바일 결제를 하고, 은행·주식 거래도 앱으로 한다. 신용카드 사용내역, 현금 입출금 내역, 보험가입 내역에 혈압, 운동·수면 시간, 식단 같은 신체정보까지 들어있다. 온라인마켓 앱에는 무슨 상품을 언제 구입했는지, 평소 무슨 상품을 검색하는지 기록돼 있다. 내비게이션 앱에는 언제, 어느 길을 통해 어디로 갔는지 남아있다. 배달앱을 보면 몇시에 무슨 음식을 어디로 주문했는지 알 수 있다. 검색어 목록이 남아있는 네이버와 구글, 개인적인 일까지 상담했던 AI, 혼자 몰래 본 영화와 동영상 기록이 담긴 유튜브와 OTT 앱도 있다.
이걸 다른 사람이 강제로 가져가 분석한다고? 말도 안 된다. 그런데 막 출범한 ‘헌법존중 정부혁신 TF’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휴대전화를 ‘자발적으로’ 받아 공무원의 내란 가담 여부를 밝힐 계획이다. 국무총리실 총괄TF에 이어 48개 중앙행정기관에 자체 조사단이 구성됐다. 평생 같은 직장에서 때론 동료로, 때론 경쟁자로 일했던 사람 중 누구는 휴대전화를 뒤져 내란에 가담할 생각이 있었는지 찾아내고, 누구는 휴대전화를 빼앗긴 뒤 불안과 불쾌함에 밤잠을 설쳐야 한다. 자발적이니 괜찮다고? 이미 휴대전화와 비밀번호를 제출하지 않으면 대기발령 또는 직위해제라는 예고가 있었다. 아니라고 우겨도 강압일 수밖에 없다. 비밀리에, 신속하고 신중하게 처리한다고? 20년 넘게 함께 일하면 직장 동료의 회사 생활, 인간관계, 집안 대소사를 대략 알게 된다. 그들 중 누군가가 다른 동료의 휴대전화를 샅샅이 뒤지면 어떻게 될까. 그 조직은 결코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알려지면 수치스러운 나의 내밀한 일들을 나보다 더 잘 알게 된 사람과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만큼 대범한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이제 막 출범한 TF가 이 일을 어떻게 ‘무난하게’ 처리할지 궁금하다. 가급과 나급을 포함한 고위공무원단(중앙부처 1~3급)만 1500명이다. 고공단을 운영하지 않는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및 소방·경찰 등 특정직 공무원을 포함하면 2000명이 훌쩍 넘는다. 75만명이 넘는 공무원 모두가 조사 대상이 될 수 없겠지만 고공단에 포함된 2000명은 TF의 조사망에서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발상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 영장 없이는 휴대전화를 포렌식 할 수 없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정권을 잡았으니 공무원은 막 다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내란은 비정상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엄중한 잘못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려면, 휴대전화를 뒤져 나온 내용을 다른 곳에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명의의 서약서라도 먼저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