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이 유한하기에 빛을 발하는 감정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일 여기 없을 수도 있고, 마주 보고 있는 이 순간이 마지막 장면일 수 있으며, 우리의 이야기가 언제 어떤 식으로 끝날지 예견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를 각성시키는 건 생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내면 깊이 자리를 잡은 애틋함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우리는 사라짐을 최종 차원으로서가 아니라, 널리 편재한 차원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 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한때 사라짐의 토대 위에서 삶을 일궜던 사람들은 소멸로 흘러들며 이름 석 자로, 빛바랜 사진으로, 기억의 조각으로 자신이 있었다는 흐릿한 흔적을 남겼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존재는 모두 같은 수순을 밟을 것이다. 생활의 무게에 치여도, 희망을 붙잡고 크고 작은 위기를 겪어도 다시 또 웃는, 우리들의 살아 있음이 나는 너무 애틋하다.
어제와 같은 찬에 밥을 먹다가,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작업실 청소를 하다가, 주전부리를 사러 가다가,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자란 잡초를 보다가도 부지불식간에 소멸의 바람이 분다. 그 온도가 몸서리치게 시리지는 않다. 늠름하게 서글픔을 수용하면, 때 묻은 욕망이 흩어지고 순수만 남아 잘 새겨들으라는 듯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낸다. 상실의 자리에 사랑만을 남기자. 최후의 하루를 살듯 진심을 다하자. 이 세상에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단 하나가 사랑이라면, 내 가진 가장 고운 마음을 아낌없이 쏟자. 사랑하라, 더 많이 사랑하라.
그래서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전화를 걸어 식사를 챙겼는지 물었다. 잡초를 밟지 않았고 새소리를 흘려 듣지 않았다. 주말에 외할머니를 뵈러 무주에 가자고 말했다. 소식 뜸한 친구에게 안부를 건네고 긴 시간 그의 세상을 공유했다. 오늘은 감나무 끝에 달린 홍시가 여전한지 살폈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